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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으라차차! 다시 꿈을 위해 모래판을 달군다
[기고]으라차차! 다시 꿈을 위해 모래판을 달군다
  • 거제시민뉴스
  • 승인 2015.08.07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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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민/거제시 체육회부회장·칼럼니스트
▲ 손영민

오래전, 연습도 잘 안하고 항상 빈둥거리는 무명의 축구선수가 있었다. 간신히 유니폼을 입긴 했지만 팀이 연습할 때만 어기적거리며 나타나 자리를 지키고 팀에 도움이 되지못했다. 아예 재능이 없는 선수도 아니었는데 무척이나 축구를 하기 싫어했다. 그는 초등학생시절 별명은 도망자였다. 마산합포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축구를 시작했던 그는 선수들과 합숙하며 본격적인 엘리트 선수과정을 밟았다.

새벽5시부터 기초체력훈련을 시작으로 하루에 총 10시간 이상을 운동했다.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그래서 밤을 틈타 합숙소를 이탈해 마산·창원 시내를 배회하기 일쑤였다. 가출횟수가 10번을 넘었다. 방황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어느 날, 그의 체력에 홀딱 빠진 마산교방초등학교 씨름부감독을 따라 씨름에 입문했다. 그의 나이 11세 때다.

며칠 뒤 큰 시합이 있었다. 평소 운동에는 전혀 의욕이 없던 그가 갑자기 경기에 나가고 싶다고 코치를 졸라댔다. 그러나 워낙 중요한 시합이었기 때문에 다른 선수들 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그를 내 보낼 수는 없었다. 경기가 시작된 후에도 그는 코치에게 자기를 뛰게 해 달라고 졸라댔다.

그동안 팀은 상대팀에게 계속 끌려 다니면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상황은 악화되기만 했다. 그러자 단체전에서 승리를 체념한 코치는 그때까지도 여전히 졸라대고 있는 그에게 “그래 들어가 한번 해봐라. 어차피 진 게임이니까”하고 말했다. 그런데 그가 들어가자 말자 순식간에 상대선수를 모래판에 엎어 버린다. 그는 전설속의 운동선수처럼 극적인 역전 플레이를 성공해 냈다.

씨름경기장은 관중들의 함성소리로 떠나갈듯 했다. 그 선수는 영웅이 되었다. 흥분이 가라앉고 난 뒤에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한 코치가 그를 불러 물었다. “그런 엄청난 경가를 아직 본적이 없었어. 어떻게 된 거야?” 그러자 선수가 말했다. “아시다시피 방황하는 아들 걱정에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부모님을 생각하면 어떻게 제가 달라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는 어느새 한번 연습에 돌입하면 끝장을 보는 노력파가 돼 있었다.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인생을 뛰느냐’를 일찍이 알아차린 윤 경호장사의 유년시절이야기다. 거제시 거제면 서정리가 고향인 윤 장사는 지금도 거제유일의 장사출신 씨름선수로 남아 있다.

1996년은 혜성같이 나타난 신예의 등장으로 씨름판이 시끄러워 졌다. 마산 교방초등학교-마산중학교-충무고등학교를 거쳐 경남대4학년 때 현대씨름단에 입단한 윤 장사는 그해 8월31일 호주시드니 달링하버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호주장사 씨름대회’에서 이변의 드라마를 연출하며 모래판의 신성으로 등극했다.

필자는 호주천하장사 대회에서 우승한 윤 경호장사의 금의환향으로 거제시가 축제분위기에 빠져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렇게 무섭게 등장한 윤 장사는 탄탄대로를 걸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호주장사에 등극한 그해 겨울,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하며 부상과의 불편한 동거를 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결국 대회를 포기하고 큰 병원으로 가서 당장 수술을 받았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윤 장사는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다. 워낙 부상이 잦았기에 수술하면 났겠지. 그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수술이 끝나자 의사선생님이 말했다. 무릎 후방십자인대가 파열되어 무릎에 힘을 가하면 점점 근력이 떨어질 것이라고, 그러니 씨름을 다신 하면 안 된다고. 많은 것을 포기하며 운동에 전념했는데...절망 그 자체였다.

순간적인 힘을 가하는 게 중요한 씨름에서 무릎부상은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는 것. 그런데 절망 한 가운데에서도 도저히 씨름만은 포기가 안됐다. 힘들게 사시는 부모님과 민속씨름을 사랑하는 고향사람들을 위해 다시 일어나야 했고 무엇보다 이전처럼 평범하게 내 꿈을 좇으며 살고 싶었다.

“기술로 보완해 보자.”며 털보 이 승삼 선배와 다시 훈련을 시작했다. 상대선수를 단번에 넘겨 버리는 주특기 기술(끌어치기, 목감아돌리기)을 연마했다.

이후 1999년 5월, 삼척장사 씨름대회에서 백두장사에 등극하며 3년간의 부상악몽을 어느 정도 달래기는 했지만 부상의 여파는 계속 따라 다녔다. 하지만 2년 뒤 씨름인생에 피날레를 장식할 수 있는 무대가 마련된다. 2001년 4월, 5년간의 현대씨름단 선수생활을 청산하고 신창 코뿔소 씨름단으로 유니폼을 바꿔 입은 윤 장사는 그해 10월 자신의 마지막 무대가 될 지도 모를 영암장사대회에서 첫 지역장사에 등극하는 기쁨을 누렸다.

강인한 정신력으로 부상악몽을 이겨내며 버텼던 윤 장사는 끈질기게 자신을 괴롭히는 부상 때문에 이듬해인 2002년, 프로입단 7년 만에 아쉽게도 화려한 선수생활을 마감하게 된다.

씨름판을 발칵 뒤집어놓을 것만 같았던 윤 장사는 부상이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서서히 잊어져 갔다. 고향 거제로 내려온 윤 장사는 다시 마주해야할 낯선 지도자의 세계로 과감하게 도전장을 던졌다. 노력하는 자에게 꼭 꿈은 이루어지는 법! 윤 장사는 지금 새로운 시작점에서 또 다른 ‘금빛 모래판’의 꿈을 놓지 않았고 드디어 결실을 맺기 시작한다.

올해는 윤 장사에게 참 중요한 해였다. 윤 장사의 열정적인 가르침과 선수들의 배우려는 열의가 더해져 거제초 6학년 안 병근 선수가 제44회 전국소년체전 경남대표 씨름선수로 선발되어 7월에 펼쳐진 전국선수권씨름대회와 전국대통령배씨름대회에서 연이어 은메달을 획득하는 쾌거를 일구어 냈다. 또 이에 앞서 5월에 열린 대통령배경남씨름 왕 선발대회에서 대회3연패의 대 기록을 달성했을 뿐만 아니라, 올 여름에는 거제시 씨름선수단이 전국여름씨름대회를 싹쓸이함으로서 거제씨름이 명실상부한 경남 최강임을 입증시켰다.

이제, 지도자로서 제2의전성기를 맞이한 윤 장사는 씨름스타출신답게 여성씨름단 창단을 위한 고민도 많다. 올해에 여성씨름단이 창단 된다면 현역시절 ‘호랑이 감독’으로 이름을 날렸던 황 경수스승과 함께 펼치는 화끈한 세리머니를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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