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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창작, '정과정곡(鄭瓜亭曲)'과 정서(鄭敍)>…②
<거제도 창작, '정과정곡(鄭瓜亭曲)'과 정서(鄭敍)>…②
  • 거제시민뉴스
  • 승인 2014.02.11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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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서(鄭敍)의 배소 거제도 오양역(烏壤驛) 

1). 오양역(사등면 오양리) : 고려시대 995년 성종 14년 중앙집권제와 지방통치제도가 확립되면서 전국을 연결하는 국도 22곳에는 곳곳에 역(驛)을 설치했다. 역은 모두 525곳으로, 각 주(州)에 속한 역로를 관리하도록 했는데 중앙 개성으로부터 전국으로 뻗어나간 22개 역로 중에, 산남도(山南道)길 즉, 전북 전주에서 진안을 거쳐 경남의 거창∼합천∼진주(통영 거제)까지의 길로, 28개의 역참 마지막 역이었고 당시 개경에서 가장 멀리 위치한 곳이었다. 거제의 오양역(烏壤驛), 고성의 배둔역(背屯驛)과 함께 진주 평거역(平居驛)으로 연결되며 다시 여러 역로를 통해서 개경으로 연결된다.

○ 거제부읍지(巨濟府邑誌, 1759년) 오양역 : 읍치 서쪽 40리 구증 홍치 경신년(1500년 연산6년)에 역에 돌로 쌓아 만든 보를 설치하였고, 성 둘레가 2150척, 높이 15척이다. 수자리 사는 권관을 배치하였다. 금폐. 역에서 북으로 고성 구화역까지 40리 떨어져 있고, 중마 5필과 짐 싣는 수말 5필, 그리고 역리 20인을 두고 있다. [烏壤驛 在府西四十里舊增弘治庚申設堡於驛石築城周二千一百五十尺高十五尺置權管戍之今廢爲驛北距固城仇火驛四十里中馬五疋卜馬五匹驛吏二十人 見乃梁院 在府西四十里]

2). 고려시대 정과정(鄭瓜亭)을 지은 정서(鄭敍, 생존 연대 미상)는, 역모로 1157년(의종11년)에 거제도로 이배되어 왔다.  거제현 오양역에서 13년 8개월이라는 오랜 기간의 유배생활을 했으며, 이후 정서(鄭敍)의 지인(知人) "임춘"이 그의 시에서 거제도 유배생활을 언급하고 있다.

"사는 곳은 역(驛)과 같았네 (거제시 사등면 오양리)  / 남쪽 땅에 나쁜 기운을 품은 안개가 짙으니 (거제도 해상의 아침 풍경) / 기맥을 다칠 것을 걱정할 정도 였네 (자신의 건강을 염려)  /  할 일없이 산골을 돌아다니다가 (기치산 우두산) / 여러 번 나막신 신고 산에 올랐다네. (먼 유배지에서 자신의 심경을 표현)“

정서의 열악한 거제도 귀양살이를 엿볼 수 있다. 고려시대 정서(鄭敍)와 고려의종이 거제까지 유배를 온 결정적인 이유도 고려시대 역로 길 중 가장 멀리 마지막에 거제 오양역이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3). 고려말기 왜구의 잦은 침범으로 오양역이 폐지되었다가 두 차례의 대마도 정벌 후에 남해안 도서지방이 안정을 찾자 1425년(세종7년)에 다시 복구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복구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거제현(巨濟縣)의 오양역(烏壤驛)을 복구(復舊)하였으니, 지현사(知縣事) 손이순(孫以恂)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당초에 고성(固城)의 송도역(松道驛)에서 거제현까지가 70리이고, 거기서 옥포(玉浦) 영등(永登) 각 포까지는 또 요원(遼遠)하므로, 송도역 말이 많이 시달려서 죽게 되는 까닭으로 이 역을 설치하게 된 것이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 세조 29권, 8년(1462 임오 ) 8월 5일 기사에는 "병조의 건의로 각도의 역·참을 파하고 역로를 정비하여 찰방과 역승을 두다" 오양역을 포함한 16역은 소재도 역승(召材道驛丞)으로 일컫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1500년(연산6년) 오양에다 오양보(烏壤堡)와 역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오양포(烏壤浦)를 말할 때 ‘오양역에 있다’는 한마디로 설명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진주 소촌역 문산찰방 관할로서의 역로의 끝에 위치한 종점 이었다. 

[주] 柳淑(유숙) : 1316-1368년, 고려 공민왕 때의 문신 본관 서령 자 순부(純夫), 호 사암(思菴)
4). 오양에 역원을 둔 것은 당시 고려시대에는 바다를 건너 최단거리인 이곳에서 말이나 수레를 갈아타고 아주현 송변현 명진현 고현(고정부곡)으로 가장 빠른 시간에 도착 할 수 있는 최소 시간이기 때문이었고, 역의 재정을 꾸려나가기 위해 공해전이 필요 했는데 견내량에서 가장 가까운 근처에 하천과 들녘이 있는 지역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특히 거제도는 유배자가 많아 견내량을 진선(나룻배)를 타고 오양리까지 건너와서 배소지로 이동했다. 거제 유배 문학 중에 진선으로 건너는 그때 심정과 풍경을 읊은 시가 다수 전해지고 있다.
옛 거제관문이었던, 사등면 '오양'의 지명어원은 우리나라 고어 '오랑'=뱃대끈, 즉 '안장이나 길마를 소나 말 위에 지울 적에 배에 조르는 줄'을 말한다. 역참의 마지막 오양역에서 '역말을 교체하고 다시 안장과 길마를 장착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는 남부지방 곳곳에서 옛 지명에 사용되었다. 당시 고유어 지명을, 한자를 빌려 차용한 것이 지금까지 쓰인 예이다.

5). 南苽行 남고(과)행. 고려시대 정서<鄭敍>의 글.

[苽亭南苽。一本兩杈 。鳧園南苽。一蔓百花。皇皇者萼。秀發朝霞。于樊于落。籠絡一家。柔則驟長。甘則受和。如鞗如韋。曝之纚纚] [고정은 남쪽 외과이며 하나의 뿌리에 두 개의 가지로 갈라지는 오리 동산의 남쪽 외과이다. 한 덩굴에 온갖 꽃이 피어 빛나는 아름다운 꽃이다. 뛰어나고 훌륭한 아침노을이 울타리에 떨어진다. 한 집을 제 마음대로 둘러싸며, 부드러운 것이 길게도 뻗어가고, 단 것이 화한 맛을 받아, 코뚜레나 다룸가죽 같고, 햇빛을 계속 쬐인다. <정서(鄭敍) 作>]

정서(鄭敍)의 '남고행(南苽行)'편을 보면 고(苽)는 '하늘타리'를 말한다. 정서는 '고(苽)' 즉, '하늘타리'라고 읊었는데 후세사람들이 과(瓜)로 잘못 이해해 '오이'로 바꾸어 불렀다. 이 당시에 하늘타리는 ‘태양(임금)을 사모하는 한결같은 신하’에 비유되었다. 정과정곡(鄭瓜亭曲)이란? '한결같이 임금을 그리는 정서의 노래'라 할 수 있다.

[주1] '오원'(鳧園)은 오리 동산이란 뜻인데, 당시 정서 선생은 오양천 작은 하천에서 노니는 오리와,  담장을 타고 초가지붕까지 오른 하늘타리에 만발한 흰 꽃이, 마치 동산에 노니는 오리의 모습과 흡사하다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당시에 하늘타리는 태양(임금)을 사모하는 한결같은 신하에 비유되었다. / 호박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부터 들어 옴.

[주2] 고정(苽亭) : 위 글 정서가 적은 고정(苽亭)은 우리나라 중, 남부에 많이 자라는 한울타리로 불리는 하늘수박(하늘타리)을 말한다. 온 울타리와 지붕을 여름 내내 덮고 푸른빛 과실이 익으면 황금빛으로 변하며, 그 줄기가 두 줄로 시작되어 뻗어간다.

그리고 열매를 과루(瓜蔞) 그 속에 들어있는 씨를 과루인(瓜蔞仁) 땅속에 들어있는 뿌리를 천화분(天花粉) 이라 부릅니다. 하늘타리의 다른 이름은 괄루(?樓, 지루:地樓: 신농본초경), 왕보(王菩: 여씨춘추), 택거(澤巨, 택치:澤治: 오보본초), 왕백(王白: 광아), 천과(天瓜: 이아, 곽박주), 부(?: 목천자전, 곽박주), 과루(瓜蔞: 침구갑을경), 택고(澤姑, 황과:黃瓜: 명의별록), 천원자(天圓子: 동의보감), 시과(?瓜: 의림촬요), 야고과(野苦瓜: 귀주민간방약집), 두과(杜瓜, 대두과:大?瓜: 절강중약책), 약과(藥瓜: 사천중약지), 압시과(鴨屎瓜: 광동중약), 천을근(天乙根, 천원을:天原乙: 고려시대, 이두 명칭), 천질월이(天叱月伊, 천질타리:天叱他里: 조선시대), 하늘수박, 하눌타리, 한울타리, 천선지루라고도 부른다. 다년생 덩굴식물이다. 괴근은 중약학에서는 천화분(天花粉)이라 한다. 덩굴손은 액생하고 선단이 둘로 갈라져 있다. 잎은 어긋나고 원형에 가까우며 (3)-5-7개로 천열(淺裂) 혹은 중열하며 가장자리에는 듬성한 톱니가 있거나 다시 천열(淺裂)한다. 꽃은 단성의 자웅이주이고, 수꽃은 3-8개씩 총상화서에 달리거나 단생하며, 꽃받침은 통모양이며 5장의 꽃받침잎이 있고, 화관은 백색으로 열편은 5개이며 선단부분은 가늘게 가라져서 유소상(流蘇狀)을 나타내고, 암꽃은 단생(單生)한다. 열매는 호과(瓠果)로 난원형이고 성숙시 등황색(橙黃色)을 띤다.  종자(種子)는 여러개이다. 풀 숲이나 숲가장자리, 산계곡에서 자라고 재배도 한다.

4. 각종 <정과정곡(鄭瓜亭曲)> 한시

1). 정과정(鄭瓜亭)은 고려 때의 문인인 정서(鄭敍)가 지은 가요이다. 《고려사》 악지와 《증보문헌비고》 악고에 가요의 제작 동기와 이제현의 한역시가 수록되어 있고, 우리말 가요는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전해지며, 또 《대악후보(大樂後譜)》에는 가요와 함께 곡조도 표시되어 있다. 정서의 사후 약300년 후, 《고려사(조선초기 제작)》 악지에 의하면, “작자는 고려 인종(仁宗)과 동서 간으로서 오랫동안 인종의 총애를 받아 왔는데, 의종(毅宗)이 즉위한 뒤 참소를 받아 고향인 동래(東萊)로 유배되었다. 이때 의종은 머지않아 다시 소환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오래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 그래서 정서가 거문고를 타며 이 노래를 불렀다”고 전하고 있다.

이에 후세사람들이 이 노래를 ‘정과정‘이란 제목으로 약 300년 간 조선초기까지 민중들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하게 되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그의 20년 유배기간 동안 창작한 작품이라 함이 가장 합리적이다. 하지만 정과정곡 내용 上, 거제도 둔덕기성에서 의종 앞에서 불린 노래임을 증명할 수 있다.

⌈고려의 대문인(大文人) 임춘에 따르면, 정서는 대학자이며 백락천 같은 대문호라고, 그의 저서에서 언급하고 있는데, 이러한 세속적인 노래를 불렀다는 것은, 거제도에 유폐된 의종 앞에서, 직접 하소연한 노래(가요)라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만일 동래에서 이 작품을 지었다면, 당시 정치상황과 맞물려, 불순하고 경박한 노래 내용으로 인해, 개경의 의종과 간신 무리배들이 정서를 참형에 쳐했으리라, 쉬이 유추할 수 있다. 또한 약 280년 간 민중들에 의해 구전(口傳)되다가 조선시대 초기에 문헌에 정착된 노래인 이유도 한 몫을 하니, 거제도에서 창작되었음이 확실하다.⌋

정과정의 내용은 자기의 외로운 신세를 산접동새에 비기어 임금을 그리는 절절한 심정을 읊었으므로 '충신이 임금을 그리는 노래(忠臣戀主之詞)'라 하여 궁중음악으로 불렸다. 이 노래는 <동국통감>에는 <정과정>이라 하였고, <악학궤범>에는 <삼진작(三眞勺)>이란 이름으로 실렸는데 이 삼진작이란 이름은 정과정에 붙인 악곡명이고, 가사명은 아니다. 즉 <삼진작>은 가사에 붙인 곡조 이름이다.

2). 정과정(鄭瓜亭) 각종 한시 소개

① 이제현(1287~ 1367년) 소악부에 실린 한시

憶君無日不霑衣(억군무일부점의)   님 그려 옷을 적시지 않는 날이 없으니,

政似春山蜀子規(정사춘사촉자규)   바로 봄 산의 자규(두견새, 소쩍새)와 비슷하도다.

爲是爲非人莫問(위시위비인막문)   옳거니 그르거니 사람들아 묻지 마오.

只應殘月曉星知(지응잔월효성지)   응당 새벽달과 별이 알 것이로다.

과정(瓜亭 정서(鄭叙)의 호)의 계면조(界面調) 역시 애상(哀傷)하고 유면(流湎)하여 상간(桑間, 용풍(鄘風)의 상중(桑中) 편을 이름)의 음악과 마찬가지인데, 사대부(士大夫)들이 배우고 익히지 않는 자가 없어 더욱 오래갈수록 폐해지지 아니하니, 진흥왕의, “가야국은 음란해서 스스로 멸망한 것이지, 풍악에 무슨 허물이 있단 말이냐?”는 말과 같은 것인지, 아니면 그렇게 되는 이치가 있는 것인지, 대개 일률적으로 논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② 이유원(李裕元)의 정과정(鄭瓜亭). 거제유배 : 1881년 8월1일~동년 12월까지(거제면)

種瓜餘力撫絃琴 오이 심고 남은 힘으로 거문고를 타니 曲曲悽哀撼樾林 곡조마다 처량하고 애처롭기 그지없네. 亭上啼禽亭下月 정자 위엔 우는 새 정자 아랜 밝은 달 春山疑是蜀規吟 봄철 산속의 접동새 소리인가 하노라

정서(鄭敍)는 시골로 귀양 가서 정자를 짓고 오이를 심었으며, 거문고를 어루만지며 임금을 사모하는 뜻으로 노래를 지어 불렀다. 그리고 스스로 호를 ‘과정(瓜亭)’이라 하였다. 이익재의 한역시에 이르기를, “님 생각에 옷깃 젖지 않을 날 없으니 흡사 봄철 산속의 접동새와 같네.[億君無日不沾衣 正似春山蜀子規]” 하였다.

鄭叙放歸田里 정서가 방귀전리(벼슬을 떼고 그의 시골로 내쫓는, 귀양보다 한 등이 가벼운 형벌)되어 築亭種瓜 정자를 짓고 오이씨를 심었다.

撫琴以寓意 거문고를 치며 자기 생각을 풍자했다.

號瓜亭 호를 "과정"이라 하였다

益齋詩云 고려말 익제집(이제현)에 전하는 鄭瓜亭 정과정 시이다. / 이유원(李裕元). 

[주] 이유원은 순조 14년(1814)에서 고종 22년(1885)에 생존했던 인물이다. 이 분은 <진작(眞勺)이란 악곡을 애호하고 정서(鄭敍)와 '정과정(鄭瓜亭)'에 대한 관심이 있었는데, 마침 정과정과 똑 같이 거제도에 유배 온 사실을 환기시켜 이글을 작성하였다. "정자 위에 새 울고 정자 아래 달빛 흐르며"의 시구에서 이 분이 당시에 거제도가 정과정를 지은 곳으로 보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단지 조선 말기까지 '정과정(鄭瓜亭)'과 '과정'이 조선 상류층에서 계속 작시의 대상이 되었다.

③ 양희지(楊熙止) 시

[제 정과정 題鄭瓜亭] 大峯先生文集, 양희지(楊熙止,1439~1504년)

他鄕作客頭渾白。타향에 나그네 되어 머리 모두 세었거니

到處逢人不見靑。가는 곳 만나는 사람마다 눈길이 차가워라

淸夜沈沈滿窓月。맑은 밤은 깊어 가고 달빛 가득한 창 아래

琵琶一曲鄭瓜亭 한 곡조 비파 타노니 정과정곡 일러라

④ 정추(鄭樞)의 시

風淸江瀨鴻雁鳴 가을바람에 강 여울리고 기러기는 우는데 日出海底蛟龍驚 해 돋는 해저에는 교룡이 꿈틀댄다. 我來此地訪前古 내 이곳에 와 옛 자취 회상하니 瓜亭一曲傷我情 과정(鄭瓜亭) 한 곡조 내 마음 아프게 하네.

[주] 정추(1333-1382, 고려 충숙와 복위2∼우왕8)는 호를 원제(圓濟), 문간(文簡)이란 시호를 받은 인물로 이색을 사우(師友)로 한 문재(文才)였다. 신돈을 비판한 죄로 남쪽에 유배당했다가 신돈이 역주(逆誅)되자 개경에 환도하여 재보(宰輔)까지 승진했다. 정추가 위의 시구 이외 "동래회고시"를 남겼다는 점으로 미루어 정과정 옛터를 답사했다고 생각된다.

⑤ 이원진(李元鎭)의 시

琴上曾聞古曲傳 일찍 거문고 옛 곡이 전한다는 말 듣고 此尋遺跡更依然 오늘에사 유적 찾으니 남은 자취 의연쿠나 戀君深意無人會 임금 그린 깊은 뜻 아는 사람 없는데 惟有松風學七絃 생각건대 솔바람이 거문고를 배운 듯

[주] 이원진은 조선 인조 22년(1644) 12월에 동래부사로 부임했다가 이듬해 신병으로 사직하였는데 이 때 '과정' 옛 터를 찾아 그 유적지가 있음을 확인하고 있다. 즉 1644년까지는 '과정' 옛 터는 관료 시인들이 직접 탐방하고 정서(鄭敍)의 억울하고 애틋한 사연을 읊고 있다.

⑥ 소두산(蘇斗山)의 시, 제정과정(題鄭瓜亭)  月洲集 蘇斗山(소두산)

[鄭名敍。仕高麗。被讒歸田。乃築亭種瓜。撫琴作 歌。以寓戀君之意。辭極悽惋。自號瓜亭。卽其曲也。其亭至今存焉]

他鄕爲客鬢無黑 살쩍 온통 하얗도록 타향으로 떠돌았네

何處逢人眼有靑 가는 곳 어디에나 다정한 눈빛 있었던가

一曲琵琶千古意 비파 한 곡조에 천고의 뜻 서려 있어

時時獨上鄭瓜亭 때때로 혼자서 정과정(鄭瓜亭)에 오르노라.

[주] 소두산(1627-1693)은 조선 숙종 연간의 서인과 남인간의 붕당연합정치가 치열할 때 서인 송시열 송준길 문하 사람으로 이들과 정치 운명을 같이 한 인물이다. 현종과 숙종 초 효종과 효종비의 사망으로 두 차례에 걸친 그의 어머니 조대비의 복상문제로 서인과 남인의 대결이 팽팽하였다. 효종 복상은 서인설, 효종비 복상문제는 남인설이 채택되었으나 숙종 6년(1680)의 경신환국에서 남인이 축출되고 서인이 다시 복귀하였다. 이후 소두산이 동래부사로 부임하여 '과정'을 현장답사하고 읊은 시였으니 1680년 경까지 '과정'이 남아 있어 소두산이 혼자서 때때로 정과정(鄭瓜亭)에 올랐다는 내용이다. 당시의 붕당 정치 정국이 소두산에게 어떤 심리적 갈등을 가져왔고 이 때마다 고려시대 정과정(鄭瓜亭)의 처지로 돌아가 공분을 토로하고 싶었을 것이다.

⑦ 정권(鄭權)의 시

東陵一岳小如拳 동쪽 능선의 산 하나 작아 주먹만 한데 亭毁田空葛廖纏 무너진 정자 황폐한 칡덩굴만 왕성쿠나 明月滿江人不見 밝은 달빛 강물에 가득하나 사람은 안 보이고 冷冷松韻學琴絃 거문고 소리 배웠던가 냉랭한 저 솔소리여

[주] 정권은 58세 되던 영조 25년(1749) 정월에서 그 해 6월까지 동래부사로 복무한 인물이다. 이 때 '과정'은 이미 무너지고 참외 밭은 칡덩굴만 무성했다고 하였으니 이 모습은 현장을 답사하고 실견(實見)하지 않고서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피력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무렵은 어찌하여 '과정'이 무너지도록 방치하였던가.

1151년에 간관(諫官)으로 있으면서 재상 최유청(崔惟淸)·문공원(文公元) 등과 함께 의종의 아우인 대녕후 경(大寧侯暻)과 태후(太后)의 매서(妹婿)인 내시낭중(內侍郞中) 정서(鄭敍)가 서로 결탁하여 연락유희(宴樂遊戱)한다고 탄핵하였다. 대녕후 경은 인종의 둘째아들로서 도량이 있어 중심(衆心)을 얻었으므로 당시 일부에서는 왕으로 추대될 것이라는 의심을 받기도 했었다. 환자(宦者) 정함(鄭諴)과 간신(諫臣) 김존중(金存中)은 대녕후와 친한 정서와 사이가 좋지 못하였으므로 대녕후와 정서를 모함했던 것인데, 재상 최유청, 간관 김영부 등이 이 모함을 그대로 탄핵하여 결국 정서는 동래로 귀양가고 대녕후는 파하게 되었다.

⑧ 秋日雨中有感 가을비 속에서 느낌 / 이숭인(李崇仁)

琵琶一曲鄭過庭 정과정 한 자락 비파로 타는데

遺響凄然不忍聽 그 소리 처량하여 차마 듣지 못하겠네

俯仰古今多少恨 고금을 헤아림에 새록새록 한(恨)이 솟으니

滿簾踈雨讀騷經 성긴 비 가득한 주렴에 이소경만 읊조리네.

[주] 이숭인(李崇仁, 1347년~1392년)은 고려 말의 시인, 대학자이다. 호는 도은(陶隱), 자는 자안(子安), 본관은 성주이며, 길재 대신 삼은으로 꼽히기도 한다. 포은 정몽주의 문하생이었다. 권신 이인임의 5촌 조카였다.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예의 산랑(禮儀散郞)·예문 응교(藝文應敎)·문하사인(門下舍人)·숙옹부승 등을 역임했다. 공민왕이 성균관을 개창(改創)한 뒤 정몽주 등과 함께 학관(學館)을 겸했다. 고려 문사(文士)를 뽑아 명나라에 보낼 때 1등으로 뽑혔으나 나이가 어려 가지 못했다. 정도전 등과 함께 원나라의 사신을 돌려보낼 것을 청하다가 유배된 적이 있다. 그 후 정몽주와 함께 실록을 편수하고, 1386년(우왕 12)에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이인임의 인족(姻族)이라 하여 유배되기도 하였다. 1389년 창왕 때에도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에도 혼란기를 맞아 유배·감금되었고, 1392년(공양왕 4) 이방원에게 정몽주가 살해되자 그의 일당으로 몰려 유배되었다. 조선이 건국되자 정도전의 사주를 받은 황거정에게 고의적 장형으로 살해되었다. 고려 말기의 권신 이인임, 이인복, 이인립 형제는 그의 5촌 당숙이었다. 이인립의 아들이자 종형제인 이제는 이성계의 사위였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특히 시문(詩文)에 이름이 높았다. 명과의 외교 문제를 맡아 썼으며, 그의 명문장은 명 태조를 탄복시켰다. 저서로는 《도은선생시집》(흔히 《도은집》)이 있다.

⑨ 秋日雨中有感 가을비 속에 느낌 / 柳淑(유숙)  

他鄕作客頭渾白(타향작객두혼백)  타향 나그네 되어 머리 다 희니 

到處逢人眼不靑(도처봉인안불청) 도처에서 사람 만나도 즐거운 눈빛 아니로다.

淸夜沈沈滿窓月(청야침침만창월)  맑은 밤 고요하고 창에 달빛만 가득한데  

琵琶一曲鄭過庭(비파일곡정과정)  비파 한 곡조로 정과정을 뜯노라.  

[주] 柳淑(유숙) : 1316-1368년, 고려 공민왕 때의 문신 본관 서령 자 순부(純夫), 호 사암(思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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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화 2015-08-20 13:19:30
댓글, 정진모 선생님! 맞습니다^^ 자료가 이것저것 너무 많아 제가 잠시 실수 했네요. 지적 감사합니다.^^

정진모 2015-08-13 09:58:18
南苽行은 鄭敍의 작품이 아니라 이학규 작품이 아닌가요?
낙하생집(洛下生集) > 洛下生集冊五 > 因樹屋集[戊辰] > 南苽行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