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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창작, '정과정곡(鄭瓜亭曲)'과 정서(鄭敍)…③-1
거제도 창작, '정과정곡(鄭瓜亭曲)'과 정서(鄭敍)…③-1
  • 거제시민뉴스
  • 승인 2014.02.18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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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고려시대 거제도 4현(縣) 3부곡(部曲) 2향(鄕) 1장(莊)의 행정구역 : 거제현(巨濟縣)‧아주현(鵝洲縣)‧송변현(松邊縣)‧명진현(溟珍縣), 하청부곡(河淸部曲)‧고정부곡(古丁部曲)‧죽토부곡(竹吐部曲), 말근향(末斤鄕)‧덕해향(德海鄕), 연정장(鍊汀莊).
6. 고려사절요 정서(鄭敍)의 기록

◯ 1157년 二月(이월) : 2월에 고려사절요 /의종장효대왕 /정축 11년.

정사문(鄭嗣文)을 거제현(巨濟縣)으로 옮겨 귀양 보냈다. 정사문은 바로 서(敍)요, 김이영은 서의 매부이며, 임극정은 원후(元厚)의 아들로서 대령후의 외숙[舅]이다. 이때 악공 최예(崔藝)가 사면을 만나 서울로 돌아왔는데, 아내와 불화하였다. 최예의 아내가, “최예는 여전히 죄를 뉘우치지 않고 대령후의 집을 왕래한다."고 무고하였다. 왕이 최유칭(崔褎偁)에게 명하여 국문하였으나, 증거가 없었다. 왕이 본래 도참(圖讖)을 믿어 여러 형제와 우애가 없었기 때문에, 이들을 의심하여 은밀히 간신(諫臣)에게 일러 대령후와 극정 등의 죄를 탄핵하게 하고, 또 태후가 구할 것을 두려워하여 먼저 보제사(普濟寺)로 옮겨 놓고, 겉으로는 부득이해서 윤허한 것같이 하였다.

사신 임민비(林民庇)가 말하기를, “옛날 상(象)의 악행은 천하가 모두 알았으나, 순(舜)이 유비(有庳)에 봉(封)한 것은 우애의 정을 상할까 두려워함이었다. 대령후의 모반한 정상이 드러나지도 않았고, 어머니 태후가 아직 생존해 있는데도 굳이 귀양 보냈으니, 의종도 또한 은애(恩愛)가 적은 군주이다. 유청은 마음가짐이 정직하여 일대(一代)의 명신이었고, 작승도 청백하고 강직하여 간신(諫臣)의 풍채가 있었는데, 정함에게 미움을 받아 추방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애석한 일이다." 하였다. 3월에 예빈경 이중제(李仲齊)와 그의 가속(家屬)을 남쪽 섬으로 귀양보냈다. 중제의 아내 이(李)씨는 성질이 악한데, 일찍이 사내종에게 한 말 가운데 신자(臣子)의 도리에 어긋나는 말이 있었다. 종의 아내는 본래 이씨를 미워하였기에 환관에게 말하여 왕에게 알리니, 왕이 노하여 근신에게 명해서 이씨를 묶어 오게 하여 온 가족을 귀양보낸 것이다. 이로부터 사람들이 참소의 말로 서로 이간질하니, 왕이 여러 신하들을 매우 의심하였다. [徙配鄭嗣文于巨濟縣 嗣文 卽敍也 貽永 敍之妹壻也 克正 元厚之子 於大寧侯 舅也 時樂工崔藝 遇赦還京 與妻不協 妻誣告 藝尙不悛 往來大寧侯第 王命崔褒偁 鞫之 無驗 王素信圖讖 不友諸弟 故猶且疑之 密諭諫臣 論劾大寧侯及克正等罪 又恐太后救之 先遷太后於普濟寺 陽若不得已而允之 象之惡 天下之所共知也 而舜 史臣林民庇曰 封於有庳者 恐傷友于之義也 大寧侯 叛狀未明 母后尙在 而忍使流竄 毅宗 亦少恩哉 惟淸 秉心正直 一代名臣 綽升 淸白謇諤 有諫臣風 見忌於鄭諴 未免流放 惜哉 三月 流禮賓卿李仲齊 及家屬于南島 仲齊妻李氏 性惡 嘗語僕 有不臣語 僕妻 素怨李 遂訴宦寺以聞 王怒命近臣 面縳李氏以來 闔家流竄 自是讒言交構 王多疑群臣]

<정항(鄭沆) 묘지명, 정서(鄭敍)의 아비(父)>

◯ 고려국(高麗國)의 돌아가신 예부상서 지추밀원사(禮部尙書 知樞密院使) 정 문안공(鄭 文安公) 묘지명. / 공의 이름은 항(沆)이고, 자는 자림(子臨)이며, 그 선조는 본래 동래군(東萊郡) 사람이다. 아버지 목(穆)1)은 섭대부경(攝大府卿)이고, 조부 문도(文道)와 증조 지원(之遠)은 모두 동래군의 호장(戶長)이었다. 어머니 고씨(高氏)는 상당군부인(上黨郡夫人)에 봉해졌는데, 검교장작감(檢校將作監) 익공(益恭)의 딸이다. 선친인 대부경은 네 아들을 두었으니, 제(濟), 점(漸), 택(澤)과 막내인 공이다. 제(濟)는 현달하지 못한 채 일찍 죽었지만, 점(漸)과 택(澤)은 모두 문장과 재간으로 조정에 이름을 날렸다. 공은 왕씨(王氏)를 아내로 맞았으니, 좌복야 참지정사(左僕射 參知政事) 경열공(景烈公) 국모(國母)의 딸인데 거듭 봉해져서 강릉군부인(江陵郡夫人)이 되었다. 자녀로 아들은 네 명을 낳았으나 나머지는 모두 일찍 죽고, 막내인 사문(嗣文)7)이 음(蔭)으로 장사랑 양온승동정(將仕郞 良?丞同正)이 되었는데, 지금의 상국(相國) 임공(任公, 任元?)의 사위이다. 딸은 세 명인데 장녀는 시어사 지제고(侍御史 知制誥) 최유청(崔惟淸)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내궁전고판관(內弓箭庫判官) 이작승(李綽昇)에게 시집갔으며, 다음은 내시 호부원외랑(內侍 戶部員外郞) 김이영(金貽永)에게 시집갔다. 정사문(鄭嗣文)은 뒤에 이름을 정서(鄭敍)로 바꾸었으며, 「鄭瓜亭曲」이라는 노래를 지었다.

7. 1170년 명종 즉위년 무신정변과 애첩 무비(無比) / 고려사절요 기록.

○ 8월에 수주(水州)의 백성이 밭을 갈다가 금 한 덩이를 얻었는데, 길이는 두 치[二寸] 가량 되고 머리와 꼬리가 모두 뾰족하여 형상이 거북과 같았다. 지주사(知州事) 오녹지(吳錄之)가 가져다가 바치니 좌우에서 만세를 부르며 말하기를, “하늘이 금 거북[金龜]을 내리시니, 성덕(聖德)의 감응입니다." 하며, 여러 신하가 모두 하례하였다.

8월 병자일에 왕(의종)이 연복정에서 흥왕사(興王寺)로 갔다. 이때 왕은 황음(荒淫)에 빠져 정사를 돌아보지 않고, 승선 임종식과 기거주 한뇌 등이 또 원대한 생각이 없어서 은총만 믿고 오만하여 무사(武士)를 멸시하니, 여러 사람의 노여움이 더욱 심해 갔다. 이날 정중부가 이의방과 이고에게 말하기를, “이제는 우리가 거사할 만하다. 그러나 왕이 만약 바로 환궁한다면 아직 참고 기다릴 것이요, 만약에 또 보현원으로 옮겨 간다면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하였다. 정축일에 왕(의종)이 보현원으로 행차하려고 오문(五門) 앞에 이르러 시신을 불러서 술을 따르게 하고, 술이 취하자 왕이 좌우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장하도다, 이곳은 군병을 연습시킬 만하도다." 하고, 무신에게 명하여 오병수박희(五兵手搏戲)를 하라고 하였다. 이는 왕이 무신들의 불평을 알고 후하게 상품을 내림으로써 이들을 위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한뇌는 무신들이 총애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드디어 시기하는 마음을 품었다. 대장군 이소응(李紹膺)이 한 사람과 맞잡고 치다가 소응이 이기지 못하고 달아나자, 한뇌가 갑자기 앞으로 나가더니 그 뺨을 쳐서 즉시 뜰 아래로 떨어뜨렸다. 왕이 여러 신하와 더불어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고, 임종식ㆍ이복기도 또한 소응을 꾸짖고 욕하였다. 이에 정중부ㆍ김광미(金光美) ㆍ양숙(梁肅)ㆍ진준(陳俊) 등이 안색을 변하며 서로 눈짓하였다. 중부가 소리를 높여 한뇌를 꾸짖기를, “소응이 비록 무신이나 벼슬이 삼품인데, 어찌 모욕을 이다지 심하게 주느냐." 하니, 왕이 중부의 손을 잡아 위안하고 화해시켰다. 이고가 칼날을 빼고 중부에게 눈짓하였다. 중부는 이를 말렸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에 어가가 보현원에 가까이 갔을 때 이고와 이의방이 먼저 가서 왕의 유지(諭旨)라 속여 순검군을 집합시키고, 왕이 막 문에 들어가고 여러 신하가 물러나려 할 즈음에 이고 등이 직접 종식과 복기를 문에서 쳐 죽였다. 좌승선 김돈중(金敦中)은 난이 일어난 것을 알고서 길가는 도중에 거짓 취한 체하고 말에서 떨어져 도망하고, 한뇌는 친한 환관에 의탁하여 몰래 안으로 들어가서 왕의 침상(寢床) 아래로 숨었다. 왕이 크게 놀라 환관 왕광취(王光就)로 하여금 제지하게 하니 중부가 말하기를, “화의 근원인 한뇌가 아직도 주상의 곁에 있으니, 내보내어 베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내시 배윤재(裵允才)가 들어가 아뢰었으나, 한뇌가 왕의 옷을 잡고 나오지 않았다. 이고가 또 칼을 빼어 위협하니 그제야 나왔는데, 즉시 죽여 버렸다. 지유(指諭) 김석재(金錫才)가 이의방에게 말하기를, “이고가 감히 어전에서 칼을 뺀단 말인가." 하였다. 의방이 눈을 부릅뜨고 꾸짖으니, 석재가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이에 승선 이세통(李世通), 내시 이당주(李唐柱), 어사잡단 김기신(金起莘), 지후 유익겸(柳益謙), 사천감(司天監) 김자기(金子期)ㆍ태사령(太司令) 허자단(許子端) 등 무릇 호종하던 문신과 대소 신료ㆍ환관들 모두가 죽음을 당하였는데,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이전에 정중부와 이고가 약속하기를, “우리는 오른쪽 어깨를 벗고서 머리에 쓴 복두(幞頭)를 버리는 것을 표시로 하고, 그러지 않는 자는 죽이자."고 하였기 때문에 무인도 복두를 버리지 않는 자는 역시 많이 피살되었다. 오직 승선 노영순(盧永醇)만은 본래 무사집 아들로서 무신과 서로 친하였기 때문에 죽음을 면하였다. 왕이 크게 두려워하여 그들의 마음을 위안시키려고 여러 장수에게 칼을 하사하니, 무신들은 더욱 교만ㆍ횡포하였다. 이에 앞서 동요(童謠)에 이르기를, “어느 곳이 보현찰(普賢刹)인고. 이 금[畫]을 따라가면 모두 다 도살되리라." 하였다. 어떤 자가 정중부ㆍ이고에게 고하기를, “김돈중이 먼저 알고 도망갔다." 하니, 정중부와 이고가 놀라며 말하기를, “만약 돈중이 성에 들어가서, 태자의 영(令)을 받들어 성문을 닫고 굳게 막으며 난동의 수령(首領)을 잡자고 아뢰면 일이 매우 위태한데, 어찌하면 좋겠는가." 하니, 의방이 말하기를, “만약 그렇게 되면, 나는 남해로 피신하거나, 북녘 오랑캐에게 투항하여 피하겠다." 하고, 드디어 걸음 빠른 자를 서울에 보내어 정탐하게 하였다. 그 사람이 밤에 성안에 들어가서 돈중의 집에 이르러 엿보니 고요하고 사람의 소리가 없기에, 승선(돈중)의 소재를 물으니 답하기를, “거가를 호종해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하였다. 그 사람이 그대로 회보하니, 정중부ㆍ이고가 기뻐하여 말하기를, “일은 이미 성사되었다." 하고, 그의 일당을 머물러 행궁을 지키게 하고, 날쌔고 용맹 있는 자를 뽑아 곧장 서울로 달려가게 하여, 가구소(街衢所)에 이르러 별감 김수장(金守藏)을 죽이고, 바로 대궐로 들어가서 추밀원부사 양순정(梁純精), 사천감(司天監) 음중인(陰仲寅), 대부소경 박보균(朴甫均), 감찰어사 최동식(崔東軾), 내시지후 김광(金光) 등 궐내에 숙직하고 있던 관료들을 모두 죽였다. 전중내급사 문극겸(文克謙)이 성중(省中)에 숙직하고 있다가, 난이 일어남을 듣고 도망해 숨었으나 추적해 온 군사에게 잡혔다. 극겸이 말하기를, “나는 전 정언(正言) 문극겸이다. 주상께서 만일 내 말을 따르셨다면 어찌 오늘의 난이 있었겠는가. 원컨대, 예리한 칼로 내 목을 베어 다오." 하였다. 군사가 이상하게 여겨서 결박지어 여러 장수 앞으로 송치하였다. 여러 장수가 말하기를, “우리가 평소에 이름을 듣던 자이니 죽이지 말라." 하고, 궁성(宮城)에 가두어 두었다. 이고ㆍ이의방 등이 순검군을 거느리고 밤에 태자궁(太子宮)에 다달아 행궁별감 김거실(金居實), 원외랑 이인보(李仁甫) 등을 죽이고, 또 천동택(泉洞宅)에 들어가 별상원(別常員) 10여 명을 죽이고서, 사람을 시켜 길에서 외치기를, “모든 문신의 관(冠)을 쓴 자는, 비록 서리일지라도 씨를 남기지 말게 하라." 하였다. 군졸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판리부사로 치사한 최유칭(崔褎偁), 판리부사 허홍재(許洪材), 동지추밀원사 서순(徐醇), 지추밀원사 최온(崔溫), 상서우승(尙書右丞) 김돈시(金敦時), 국자감 대사성 이지심(李知深), 비서감 김광중(金光中), 이부시랑 윤돈신(尹敦信), 위위소경(衛尉少卿) 조문귀(趙文貴), 대부소경 최윤서(崔允諝), 시랑 조문진(趙文振), 내시소경 진현광(陳玄光), 시어사 박윤공(朴允恭), 병부낭중 강처약(康處約), 도성낭중 강처균(康處均) 봉어(奉御) 전치유(田致儒), 지후 배진(裵縉)ㆍ배연(裵衍) 등 50여 명을 수색해서 죽였다. 왕이 더욱 두려워, 정중부를 불러 난동을 종식시킬 계책을 의논하니, 중부가, “네, 네." 하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왕이 즉시 이고ㆍ이의방을 응양용호군 중랑장(鷹揚龍虎軍中郞將)으로 삼았다. 그 나머지 무인 중 상장군은 모두 수사공복야(守司空僕射)에, 대장군은 상장군에 승진시켰으며, 의방의 형 준의(俊儀)를 승선에 임명하였다. 정중부 등이 왕을 모시고 궁으로 돌아왔다.

사신(史臣) 유승단(兪升旦)이 말하기를, “원수(元首 군주)와 고굉(股肱 신하)은 한 몸으로 서로 의존한다. 그러므로 옛날의 어질고 슬기로운 임금들은 문무(文武)를 좌우의 손과 같이 보아서 피차와 경중이 없어, 임금은 위에서 밝고 신하는 조정에서 화합하여 반란이 일어날 수 없었다. 의종(毅宗) 초기의 정치는 규모가 볼 만한 것이 있었으니, 진실로 충성스럽고 정직한 사람을 얻어 보좌하였다면 반드시 후세에서 찬양할 만한 선정(善政)을 시행하였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아첨하고 경박한 무리들이 좌우에 나열되어, 재를 올리고 기도하는 데 재물을 기울여 없애고, 정치에 부지런해야 할 시간과 정력을 주색에 돌렸으며, 풍월을 읊는 것으로써 신하와의 정치에 대한 의논을 대신하였으니, 점차 무인의 노여움이 쌓여 화가 장차 이르렀던 것이다. 의종이 오병수박희(五兵手搏戲)를 하게 하여 후하게 상을 내려서 그들의 원망을 위안하려고 하였으니, 왕의 마음에도 본래 어떤 예측이 있었던 것인데, 한뇌 등이, 무인들이 총애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갑자기 시기하는 마음이 생겨서 드디어 곤강(崑岡)을 태운 치열한 불길에 옥과 돌이 구별 없이 다 타고, 마침내는 임금이 쫓겨나서 최후를 좋게 마치지 못하였으니, 어찌 한스럽지 않으랴." 하였다.

9월 1일 무인일에 해질 무렵에 왕이 강안전(康安殿)으로 들어갔다. 왕광취(王光就)가 동료를 모아 정중부를 치려고 꾀하다가, 한숙(韓淑)이 음모를 누설하여, 중부 등이 다시 임금의 행차를 따르는 내시 10여 명과 환관 10명을 탐색해서 살해하였다. 왕이 수문전(修文殿)에 앉아 술 마시고 태연자약하면서 악관[伶官]으로 하여금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 밤중에야 비로소 침소로 들었다. 이고와 채원(蔡元)이 왕을 시해하려 하니, 양숙(梁淑)이 말렸다. 순검군이 창과 벽을 뚫고 내탕(內帑)에 들어가서 진귀한 보물을 훔쳐갔다. 중부는 왕을 협박하여 군기감(軍器監)으로, 태자는 영은관(迎恩館)으로 옮겼다.

9월 을묘일에 왕(의종)을 거제현(巨濟縣)으로 추방하고, 태자는 진도현(珍島縣)으로 추방하였으며, 태손(太孫)은 죽였다. 왕(의종)의 애희(愛姬) 무비(無比)는 청교역(靑郊驛)으로 도망해 숨었는데, 중부 등이 죽이려 하니 태후(太后)가 간청하여 죽음을 면하고 왕을 따라갔다. 김돈중(金敦中)은 감악산(紺嶽山)으로 도망해 들어갔는데 중부가 전부터의 원한으로 현상(懸賞)을 걸고 급하게 추적하였다. 돈중은 따라 온 하인을 시켜 몰래 서울에 들어가서 자기집 안부를 탐지해 오도록 하였던 바, 하인이 많은 현상을 탐내어 드디어 돈중의 거처를 고하여 돈중을 잡아다 냇가 모래사장에서 죽였다. 돈중이 죽음에 임하여 한탄하며 말하기를, “나는 한뇌ㆍ이복기와 동조하지 않았지만 다만 유시(流矢)의 사건으로 인하여 죄 없는 사람에게 화(禍)를 미치게 하였으니, 내게 오늘날이 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였다. 병부시랑 조동희(趙冬曦)가 일찍이 왕업을 연장할 터를 살펴보려고 서해도로 갔다가, 변란이 있음을 듣고 장차 동계(東界)로 가서 군사를 일으켜 적을 치려고 철령(鐵嶺)에 이르렀는데, 사나운 호랑이가 길을 막고 있어 지나가지 못하고 있다가, 뒤쫓아 온 기병(騎兵)에게 체포되었다. 중부 등이 의논하기를, “동희는 이전에 탐라(耽羅)를 평정한 공이 있다."고 하여, 장차 먼 곳으로 귀양보내려 하였는데, 지키던 자가 갑자기 죽여 그 시체를 물에 던져버렸다. 또 내시소경(內侍少卿) 최현(崔儇)을 죽이고, 소경 최춘(崔偆)과 원외랑 최치(崔値)는 귀양보냈다. 중부 등이 살해된 문신들의 집을 철거하려 하니 진준(陳俊)이 이를 말리면서 말하기를, “우리가 미워하고 원망하던 대상은 이복기ㆍ한뇌 등 4, 5명에 불과하였는데, 이제 무고한 사람을 죽인 것만 해도 너무 심하였다. 만약 그 집을 모두 철거해버린다면 그 처자는 장차 어디에 붙이고 살란 말인가." 하였으나, 의방 등이 듣지 않고 드디어 군사를 풀어 헐어버렸다. 이 뒤로 무인들의 상습(常習)이 되어 원한이 있으면 매양 그 집을 헐어버렸다.

사신(史臣) 김양경(金良鏡)이 말하기를, “왕이 태자로 있을 때 인종이 임종에 임하여 이르기를, '나라를 다스리려면 모름지기 정습명(鄭襲明)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했다. 습명은 본래 정직한 데다가 막중한 부탁을 받아 힘을 다하여 충언을 진달하여 왕의 과실과 부족한 점을 도왔다. 김존중(金存中)ㆍ정함(鄭諴) 등이 밤낮으로 참소하여 제거하고, 왕이 존중으로써 습명을 대신하니 이로부터 아첨하는 무리들은 날로 진출하고, 충성 있고 직언하는 사람들은 날로 물러나니, 왕은 더욱 방종하여 향락에 빠져 놀이를 즐기기를 절제 없이 하였다. 처음에 격구로 인하여 중부를 가까이 하였는데 대간이 간언하여도 듣지 않았고, 나중에는 시문(詩文)으로 말미암아 한뇌를 친근히 하였는데, 무인이 분노하여도 깨닫지 못하여 마침내 한뇌가 내란을 불러 일으켜 중부의 손에 죽고, 조정의 신하들까지 다 섬멸당하게 하였으니 왕의 좋아한 것이 처음(격구)과 뒤(시문(詩文))가 달랐으나, 그 난을 초래한 것은 동일하였다. 그러므로 임금은 좋아하는 것을 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이날에 정중부ㆍ이의방ㆍ이고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왕(의종)의 아우 익양공(翼陽公 명종) 호(晧)를 맞아 대관전에서 즉위하였다. 전왕(의종)은 도참설을 믿어 여러 아우를 꺼려했다. 왕이 잠저에 있을 때에 전첨(典籤) 최여해(崔汝諧)가 일찍이 꿈을 꾸니, 태조가 홀(笏)을 왕(익양공)에게 주니 왕이 받아 가지고 용상에 앉고 여해가 백관과 함께 하례를 올렸다. 깨고 나서 기이하게 여겨 이 이야기를 왕(익양공)에게 말하니, 왕이 이르기를, “부디 다시는 말하지 말라. 이는 큰일이다. 왕이 들으시면 반드시 나를 해칠 것이다." 하더니, 이때 과연 징험되었다.

○ 정중부 등이 총애받던 환관 백자단(白子端)ㆍ왕광취(王光就)와, 아첨하던 신하 영의(榮儀)ㆍ유방의(劉方義)를 죽여서 목을 저자에 높이 달고, 그 밖의 환관과 총애를 믿고 교만하고 방자하던 자를 거의 다 죽였다. 이전에 전왕(前王)이 3개 소의 사택(私宅)을 짓고 관북택(館北宅)ㆍ천동택(泉洞宅)ㆍ곽정택(藿井宅)이라 이름하고 재물을 거두어 모은 것이 수만을 헤아렸는데, 이에 이르러 정중부ㆍ이의방ㆍ이고가 모두 나누어 점유하였다.○ 왕이 수문전(修文殿)에 임어하는데 이준의ㆍ정중부ㆍ이의방ㆍ이고가 모시고 따랐다. 문극겸(文克謙)을 석방하고 명하여 비목(批目 벼슬 임명의 명단)을 쓰게 하였는데, 임극충(任克忠)을 중서시랑 평장사에, 정중부ㆍ노영순(盧永醇)ㆍ양숙(梁淑)을 참지정사에, 한취(韓就)를 추밀원사에, 윤인첨(尹鱗瞻)을 지추밀원사에, 김성미(金成美)를 복야에, 김천(金闡)을 추밀원부사에 이준의(李俊義)를 좌승선에, 문극겸을 우승선에, 이소응(李紹膺)을 좌산기상시로, 이고를 대장군 위위경에, 이의방을 대장군 전중감에 임명하였는데, 이고와 이의방은 모두 집주(執奏)를 겸임시켰으며, 기탁성(奇卓成)을 어사대사(御史臺事)로 채원(蔡元)을 장군으로 삼았다. 그 밖에도 무신으로 자격과 서열(序列)을 뛰어서 현달한 관직과 요직을 겸임한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의방 등이 왕에게 아뢰어 극겸을 승선으로 삼으니 문신 이공승(李公升) 등이 이에 힘입어 화를 면하였고, 무관도 또한 신뢰하여 고사(故事)를 많이 물었기 때문에 곧 용호군 대장군(龍虎軍大將軍)을 겸임하였다.○ 여러 무신이 중방(重房)에 모여 문신으로서 남아 있는 자를 모두 불렀는데 이고가 모두 죽이려고 하니 중부가 말렸다. 한 군사가 병부낭중 진윤승(陳允升)의 집에 와서 속여 말하기를, “왕의 유지(諭旨)에 먼저 대궐로 나오는 사람을 승선에 임명한다 합니다." 하여, 윤승이 나가니 군사가 그를 죽이고 큰 돌을 안겨 주었다. 이전에 수성(壽星)이 나타났다 하여 진관사(眞觀寺) 남쪽에 사당을 창건할 때, 윤승이 공사를 감독하였는데 모든 군사들이 돌을 운반할 때 반드시 저울로 달아서 받았기 때문에 이런 화를 당한 것이다.

1170년 겨울 10월에 크게 사면령을 내리고, 정중부ㆍ이의방ㆍ이고를 벽상공신으로 삼고 공신각 위에 화상을 그렸는데, 양숙ㆍ채원이 이들의 다음이었고 그들의 벼슬 1계급씩 승진시키고, 김이영(金貽永)ㆍ이작승(李綽升)ㆍ정서(鄭敍) 등을 소환하여 모두 직전(職田)을 회복시켰으며, 닭을 그려 왕의 침상에 넣은 화계(畫鷄) 사건과 김돈중의 말(馬)이 저질렀던 유시(流矢) 사건으로 귀양 간 자도 모두 서울로 오게 하였다. 중부는 서해도의 군ㆍ현을 모두 그의 고향인 해주(海州)에 속하게 하고, 의방은 그의 외가(外家) 고을인 금구(金溝)를 현령관(縣令官)으로 승격시켰다.○ 공부낭중 유응규(庾應圭)를 금나라에 보내어 표문을 올리기를, “삼가 보건대 신의 형 현(晛)이 오랫동안 주 나라 왕실[周室 금나라를 비유함]을 높이 받들고, 즐겁게 한 나라 번국[漢藩 고려를 비유한 것]의 도리를 따랐습니다. 중년에 이르러 병으로 인하여 드디어 여러 해 동안 신음하여, 이름난 의원도 손을 대지 못하였거늘 한 개의 환약(丸)이 어찌 다시 그 신령한 효험을 나타내리오. 오랜 병이 점점 깊어져 나라를 무너뜨릴까 두려워하여, 근자에 중대한 책임(왕위)을 벗어남으로써 남은여생을 보전하려 하였습니다. 신의 선국왕(先國王 인종)인 신 해(楷)의 유언(遺言)을 받들었기 때문에 신이 동모의 형제가 되므로 선대의 유업을 부탁할 만하다 하여, 신으로 하여금 임시 군국의 사무를 지켜 보게 하니, 신이 회피할 계책도 없고 받아들이기도 또한 진실로 어려운 바 있어, 장차 대국에 가서 호소하려 하였으나 다만 산천의 길은 더욱 멀며, 또 만백성에게 주인이 없을 수 없고, 종묘를 지키는 사람이 없을 수 없어 억지로 국인의 뜻에 맞추어 임시 책임을 맡았기에 감히 그 사실을 갖추어 황제께 진달하나이다." 하였다. 전왕의 이름으로 표를 올리기를, “신이 오랫동안 질병에 걸려 점점 쇠약하고 수척하더니 정신이 이로 인하여 혼미하고, 기운도 이로 말미암아 쇠잔하여 의원이 독소를 다스려도 효험이 없고 약을 독하게 힘껏 먹어도 낫지 않으니, 이수(二豎: 병)가 고황(膏肓)에 들어 하늘이 혼백(魂魄)을 빼앗은 것입니다. 선인(先人)의 나라 다스리는 교훈을 공경히 받들고 열국(列國)에 솔선하여 상국에 조공을 하는 일에 관하여 민정(民政)이 책상에 가득히 쌓여도, 혹 결재를 폐하기도 하고 국빈(國賓)이 연속 이르러도 혹 영접의 예를 잃기도 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가 이미 어그러지고, 황제를 섬기는 예의도 많이 차질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병상에 엎드려 거의 몸과 사지(四肢)를 자리에 버려 둔 채 움직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황제의 보호해 주신 은혜를 생각하고, 신의 선조의 개척하고 씨 뿌린 유업을 생각한즉, 신이 옛날 신의 부친인 전국왕을 섬길 때에 일찍이 신에게 부탁하기를, '혹 왕위를 교체할 경우가 있거든 반드시 먼저 네 아우에게 전하라.' 하였습니다. 이제 신에게 원자 홍(泓)이 있으나 어려서는 총명하지 못했고, 장성하여서도 또한 허물이 많아 종묘를 받들기를 감당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다시 번국(藩國)의 직명을 받들 수 있겠습니까. 삼가 살펴보건대, 신의 아우 호(晧)의 충순(忠順)한 덕은 일찍부터 왕과 어버이를 잘 섬겼고, 돈목(敦睦)하고 공손한 마음은 언제나 게으름이 없었습니다. 이에 그 착한 행실이 한결같음을 아름답게 여기고, 더욱 유명(遺命)의 징험 있음을 알겠기에 이에 신의 아우 호를 시켜 임시 군국의 사무를 맡아 지키게 하고, 감히 이에 주달하니 이 정성을 살피심을 바랍니다." 하였다.

사신 김양경(金良鏡)이 말하기를, “옛날 당(唐) 나라 명종(明宗) 때에 대리소경(大理少卿) 강징(康澄)이 소를 올려 시사(時事)를 말하기를, '국가를 다스리는 자가 두려워할 것이 못 되는 것이 다섯 가지가 있고, 깊이 두려워할 것이 여섯 가지가 있으니, 해와 달과 별이 궤도를 벗어나는 것이 두려울 것이 없고 천상(天象)에 변괴가 보이는 것이 두려울 것이 없으며, 간사한 사람들의 거짓된 말도 두려울 것이 없으며, 산이 무너지고 냇물이 마르더라도 두려울 것이 없으며, 수재ㆍ한재ㆍ황충의 재해도 두려울 것이 없으나, 어진 선비가 물러나 자취를 감추는 것이 깊이 두려워할 일이요, 염치(廉恥)가 떨어져 없어지는 것이 깊이 두려워 할 일이요, 왕과 신하가 서로 순종만 하는 것을 깊이 두려워할 일이요, 비방과 칭찬이 사실을 어지럽히는 것이 깊이 두려워할 일이요, 바른말을 듣지 않음이 깊이 두려워할 일이다.' 하였는데, 구양공(歐陽公 구양수(歐陽脩)이 이 말을 기록하기를, '무릇 국가를 다스리는 자가 어찌 이를 경계하지 않아서야 되겠느냐.' 하였으니, 참으로 옳도다. 이 말이여. 도대체 전왕이 불법을 높이 받들고 신을 공경하고 믿어 따로 경색(經色)ㆍ위의색(威儀色)ㆍ기은색(祈恩色)ㆍ대초색(大醮色)을 세우고 재(齋)를 올리고 기도하는 비용을 한정없이 징수하여 구구하게 부처를 섬기고 신을 섬겼으나, 이복기ㆍ임종식(林宗植)ㆍ한뇌(韓賴)와 같은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로 좌우를 삼고, 정함(鄭諴)ㆍ왕광취(王光就)ㆍ백자단(白子端) 같은 아첨하고 말 잘하는 소인을 환관으로 삼고, 영의(榮儀)ㆍ김자기(金子幾) 같은 음흉한 자로 술사를 삼았으며, 총애 받던 폐첩(嬖妾) 무비(無比)가 안에서 일을 주장하니 왕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마음을 유도하려고 다시 서로 요사스러운 아첨을 일삼으니 달콤하고 교묘한 말이 분분히 일어나고 바른말이 끊어져 변란이 서울 안에 일어났지만 마침내 이를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 두려워하지 않을 바를 두려워하고, 두려워할 바를 두려워하지 않은 까닭이던가. 또 변이 일어나던 시초에 한 사람도 왕을 위하여 죽지 않았고, 왕위를 교체한 뒤에도 허위로 표(表)를 꾸미기를 이같이 하였으니 더욱 가탄할 일이다." 하였다.

금나라에서 대종정승(大宗正丞) 야율규(耶律糺)를 보내어 생신을 하례해 왔는데, 야율규가 국경에 이르자 변경의 관리가 전왕(고려 의종)이 양위하였다는 것으로 이를 물리쳤다. /

[주1] 유시(流矢) 의 사건 : 김돈중이 전년에 왕을 호종하다가, 자기가 탄 말이 뛰어서 기병이 차고 있던 전통(箭筒) 에서 화살이 빠져 나와 왕의 옆에 떨어졌다. 왕이 놀라서 범인을 잡으라 하는데도 돈중이 자기의 과실임을 고백하지 않아서 무고한 다른 사람이 많이 잡혀 죽었다.

[주2] 이수(二豎) 가……들어 : 춘추(春秋) 때에, 진(晉) 나라 경공(景公) 이 병이 들어 진(秦) 나라의 명의 (名醫) 를 청하였는데, 그가 오기 전에 경공의 꿈에 두 수자(豎子) 가 서로 말하기를, “내일 명의가 오면 우리를 처치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고(膏) 의 밑과 황(肓) 의 위로 들어가면 명의도 어찌 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다음 날 명의가 와서 진찰하고는, “병이 고황(膏肓) 의 사이에 들어갔으니 치료할 수 없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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