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13:23 (금)
거제도 창작, '정과정곡(鄭瓜亭曲)'과 정서(鄭敍)…③-2
거제도 창작, '정과정곡(鄭瓜亭曲)'과 정서(鄭敍)…③-2
  • 거제시민뉴스
  • 승인 2014.02.25 08: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무비(無比) : 관비(官婢) 출신 궁녀 무비(無比)는 의종과의 사이에서 3남9녀를 낳았으니 임금 의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무비(無比)는 사위 최광균(崔光鈞)·김광균(金光均) 등을 관리로 천거해 부당하게 임명장에 서명하도록 압력을 행사하기도 했고, 환관 왕광취(王光就)·백선연(白善淵) 등과 왕의 침실로 드나들며 권세를 부렸다. 무신정변 때에는 자신을 짝사랑하던 이의방의 도움으로 무사하였고 의종을 따라 거제도로 떠났으나, 이의방은 이의민을 시켜 무비를 개경으로 압송하도록 했다. 이의방과 재회한 무비는 이의방의 실질적인 부인이 되었다. 무신정권이 들어선지 3년째 되는 1173년 동북면병마사 김보당이 거제로 간 의종을 경주로 모시고 난을 일으켰고 결국 의종은 이의민에게 살해되었다. 1174년 서경유수 병부상서 조위총이 난을 일으켰는데 대규모의 진압군이 서경으로 출발하고 난 후, 이의방은 정중부의 아들 정균의 칼에 무참히 살해되고 말았다. 무비는 저잣거리에 버려진 이의방의 시신을 거둔 후, 머리를 깎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8. 임춘(林椿)이 쓴 정서(鄭敍, 鄭嗣文)의 이야기

◯ 유배문학의 효시 [정과정곡]을 지은 정서(鄭敍)는 1157년 의종 11년 2월12일에 거제도 사등면 ‘오양역‘으로 이배되어, 정중부의 난 이후 1170년 10월 말 사면령이 내려 복권되었다. 다음 한시는 정서의 사후, 임춘이 정서의 행적을 읊은 작품으로 정서의 역사기록에 가장 신뢰성 있는 글이다. 이후 정과정곡 창작시점에 관한 역사기록은, 모두 약300년 이후 구전되어 전해지다가, 조선초기 역사기록에 다시 등장하게 된다. 또한 조선초기 학자들은 동래에서 거제도로 이배되었다는 사실과 고려의종과 재회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부분이 못내 아쉽다.

1). 정시랑(정서) 서시 차운(次韻鄭侍郞敍詩) (并序) / 고율시(古律詩) 六十一 서하집(西河集) 임춘(林椿,1148-1186).

[故學士鄭公。余不及見之。有藏其遺藁者。乃公貶南時所和中淳禪老詩也。追和其韻。

옛 학사 정공을 나는 만나지는 못했다. 남긴 유고를 감추고 있다가 공이 남쪽 귀양 가 있을 때, 중순선로의 시를 모아 놓은 것이다. 그 운에 뒤쫓아 화답하여.. ]

[先生自名家 累葉傳侯伯 相襲 珥貂蟬 皆立門前戟 公初有異器 能繼前人迹 斷乳始屬文 技巧又兼百 至尊召之見 降輦迎大白 欣然賜龍顏 寵愛日以益 握手入臥內 契密如金石 廷臣多缺望 聲勢方炎赫 中間忤貴倖 巧讚含沙射 見黜金閨名 良由釁所積 長沙逐賈生 無復虛前席 滄浪作釣翁 浮家而泛宅 千載雖一遇 飜覆在朝夕 固知行路難 擧足多岝峉 始自毫髮差 遂成丘山責 終身纏罪辜 顚踣常動魄 禦魅二十年 愆過懲於昔 遷徙席不暖 所居如郵馹 南中瘴霧深 可虞傷氣脈 優游縱巖壑 屢躡登山屐 聖明方在上 招還劉禹錫 識者聞而喜 以手但加額 是時仇家去 誰作鴟鴞嗝 歸來守先廬 賜書存舊壁 一日朝紫宸 經筵爲之闢 天語垂丁寧 問以寒暄隔 及當危難際 立朝多逼側 忠誠不見知 空使血化碧 忽昨見遺墨 之人猶目擊 神毫鬪蛟螭 大手搏貙獥 翻瀾一快讀 嗜閱空成癖 還疑照乘珠 初從頷下索 觀者已爭購 流傳遍蠻貊 哀哉命壓頭 平生困廝役 雖俟河之淸 百歲如過客 否泰各有理 豈用占蓍策 至人齊寵辱 困窮無戚戚 相從子輿遊 解以生爲脊 靜默閱時人 狂惑等李赤 國恩終未報 慨爾懷奮激 膽氣雖不讓 動輒遭嘲嚇 音郝朴切 怒也 窮途墮千仞 長綆呼烏獲 出袴當俛就 唾面何敢逆 自從劉備瓜 常恐郭生麥 閑棲多暇日 章句搜且摘 感憤寓諸文 紛紛盈簡策 子雲方草玄 聊愛窮居寂 詞人多薄命 自古例陷阨 海山有歸處 仙遊邈難覓 今修玉樓記 不向人間謫 所恨不同時 意若調飢惄]

선생은 동래정씨 명가(名家)출신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후백(侯伯, 후작과 백작)했다 한다. 담비의 꼬리(고관대작)의 유지를 물러 받으니 문에 들어서면 그 앞에 모두 굽혔다. 공은 처음에는 이기(異器)가 있어 이전 선조의 자취를 이어갈 수 있었다. 젖을 떼면서 처음 글을 지었는데 기교 또한 온갖 것을 아울렀다. 지존(임금)을 초대해 보이니 가마에서 내려 큰 술잔으로 영접했다. 임금은 흔쾌히 기뻐 하사하니 나날이 총애가 더하였다. 손에 이끌러 침실 안으로 들어가 맺은 약속을 황금같이 굳게 지키었다. 조정의 신하들이 우러러 볼 정도로 기세가 무르익고 성대하였다. 중간에 권세 있는 대관을 거스르게 되니 모래를 머금고 그림자를 쏘듯, 교묘하게 모함하였다. 대궐의 벼슬에서 쫓겨나가니 도리어 허물이 쌓이게 되었다. (동래 유배) 장사로 가생(가의)이 쫓겨 갔다가 이전 자리로 다시 돌아오니 헛되지 않았다. 창랑수에 늙은 어부가 되어 물 위에 둥실 뜬 집을 지었네. 천년에 비록 한번밖에 못 만나고 아침저녁으로 언제 바뀔지 모르니 세상살이 험하고 어려움을 진실로 알겠노라. 발을 옮기니 웅장한 산이 많구나. 예전의 티끌만한 차이가 산더미처럼 많이 쌓인 책임으로 죽을 때까지 얽힌 죄과가 되어 고난을 당해 늘 넋이 뒤흔들렸다.

20년간 도깨비와 싸우게 되니 (20년간의 유배 생활) 허물은 예전에 징계됐는데도 옮겨간 자리는 따뜻할 날이 없는 (거제도 이배) 역참 같은 곳에 살았다네. (거제도 오양역) 남쪽 땅에 나쁜 기운을 품은 안개가 짙으니 기맥을 다칠 것을 염려할 정도였네. 할 일없이 가파른 골짜기를 돌아다니는데 언제나 나막신 신고 산에 올랐다.(거제도 둔덕기성) 임금의 총명이 나라위에 있으니 류우석을 다시 불러 들이 듯, 식자(識者)는 듣고 기뻐하며 손으로 이마에 얹고 기다린다. 이 즈음에 원수의 집으로 가서 (말하길) "누가 올빼미 울 듯 했는가?" 본가로 돌아와 머물렀는데 임금이 내린 글이 묽은 벽에 남아 있었다. 어느 날 아침 궁전에서 경연을 열었는데 임금이 틀림없는 말씀하시며 그 동안의 안부를 물었다. 그러나 위험한 재난에 처한 때에 벼슬에 올라 기웃거리게 된다면 충성은 알려지지 않고, 피로 하여금 푸른빛으로 얼룩져 헛되리라. 문득 어제 남겨둔 필적 보니 직접 눈으로 본 분 같다. 신령한 붓글씨가 교룡이 다투듯 하고, 맹수와 이리를 다루듯 뛰어난 솜씨였다. 파도가 뒤집히듯 한번 시원스레 읽어보니 고질병이 뚫리듯 즐겨 읽힌다. 구슬이 비스듬히 비추니 도리어 미혹되어 처음으로 용(龍) 턱밑의 구슬 찾게 한다. 보는 사람들이 다투듯 구해가니 오랑캐까지 널리 소문이 났다. 슬프도다, 운명이 먼저 찾아와 평생 천한 사역에 시달렸도다. 아무리 흐린 황하강물 맑아지기 기다려도 지나가는 나그네 같은 세월이었다. 운수는 각각의 이치에 있는 바, 어찌 시책(점치는 법)으로 점을 치고자 하는가? 덕이 높은 진인(眞人)은 총애와 수모를 경계한다네. 어렵고 궁핍함에는 근심이 없도다. 자여와 서로 벗하여 노닐다가, '삶을 등뼈로 삼는다'는 장자의 막역지우(莫逆之友)를 깨달았다. 당시 사람들을 보며 조용히 침묵하는데 이씨를 몰살하는 등 미쳐서 혹하였다. 나라의 은덕을 끝내 보답하지 못하고 슬퍼할 뿐, 분개해 떨쳐 일어날 마음으로만 달랬다. 비록 양보하지 않으려는 담력이었으나 무엇을 하려해도 비웃음만 당하고 학씨 박씨 말만 들어도 온통 노여워했다. 천 길로 떨어진 곤궁한 처지가 되었어도 언제나 수레를 막으며 힘센 자들(무인들)을 호통 쳤다. 바지 밑으로 굽히며 빠져 나갔으나(큰 뜻을 품고 굴욕을 참는 일) 얼굴에 침을 뱉으니 어찌 감히 거역했다 하리오? 예로부터 오이를 준비하여 베푸는 것을 따르나, 언제나 두려운 건 보리가 자란 성곽이다. 한가하게 쉬는 날이 많아 문장을 찾아보니 남의 글을 인용했구나. 모든 글월을 보내니 분한 마음 생겨나는데 서책이 가득하여 어수선하고 뒤숭숭하다. 자운(子雲, 양웅)이 세상명리에 관심 없이 초연했듯이, 조용히 궁하게 사는 것을 사랑하였다. 시인의 운명은 기박함이 많다더니 예로부터 고난 속에 빠진 예가 많다. (유배 찬축) 섬의 산에는 돌아가는 곳이 있으나 신선이 노니는 먼 곳이라 찾아보기 어렵다. (거제도 먼 변방) 이제 옥루기를 쓰고자(돌아가시니, 정서의 사망) 인간의 귀양살이로 향하지 않는구려, 언제나 같은 때에 있지 못해 한(恨)인데 아아~ 허전하여 계속 굶주린 듯하구나.

[주1] 양습(相襲) : 서로 영향을 미침을 가리킨다. “襲”에는 “及”의 뜻이 있다.

[주2] 이초(珥貂) : 옛날 시중(侍中)ㆍ상시(常侍) 등의 관에 장식으로 꽂았던, 담비의 꼬리를 모자에 달았던 것, 고관귀족만 달 수 있었다.

[주3] 초선(貂蟬) : 초선(貂蟬)은 서시, 왕소군, 양귀비와 함께 중국의 4대 미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폐월초선(閉月貂蟬)이란, "달이 부끄러워 숨어버린 얼굴"이란 뜻이다. 이름은 한자 그대로 담비와 매미를 뜻하는 별칭일 가능성이 높다.

[주4] 이기(異器) : 끊임없이 뱉어내는 멧돌, 저절로 술이 차오르는 술잔 같은, 말도 안되는 일을 행하는 도구들을 후세에 '이기'라 불렀다.

[주5] 가생(賈生, BC200~BC168) : 한(漢)나라 문제(文帝) 때의 유명한 학자인 가의(賈誼)의 별칭이다. 20세에 박사(博士)으로 임용되었고, 박사가 된지 1년 만에 그를 태중대부(太中大夫)까지 올랐다. 그러나 건국공신들이 ‘나이가 어리고 학문이 미숙하여 권력을 독점하려 하고 모든 일을 문란케 한다.’고 반대하여 그를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장사(長沙)으로 내보내게 되었다. 가생은 우울한 심사를 상수(湘水)을 건너면서「조굴원부(吊屈原賦)를 지어서 나타냈다. 4년 후에 복귀하여 왕자의 태부(太傅)가 되었다.

굴원(屈原, BC343?~BC278?)의 사례를 통해 자신의 울분을 토로한 것이었다.

[주6] 창랑(滄浪) : 창파(滄波)라고도 하며 큰 바다의 푸른 물결이란 뜻이다. 이 시에서 창랑은 굴원의 어부사에 나오는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 끈을 씻고, 창랑의 물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에서의 뜻과

[주7] 유우석(劉禹錫) : 중국 당(唐)나라 시인, 강서성. 오군(吳郡) 출신으로서 한(漢)나라 때 중산(中山)의 정왕(靖王) 유승(劉勝)의 자손임을 자칭했었지만 기실은 흉노족의 후예로 조상이 북위(北魏) 때 낙양(洛陽))으로 옮겨왔다는 게 정설이며, 자존심이 강했다. 혁신을 주장하던 왕숙문당(王叔文黨)에 가담했다가 805년 9월에 연주(連州 자사(刺史)에 좌천되었다가 10월에 다시 낭주(朗州) 사마(司馬)로 옮겨졌지만 시를 쓸 때 그런 티를 조금도 내지 않았었다. 아무리 불우한 처지에 처하더라도 의젓하고 굳건한 자세를 견지했었다. 그의 시작(詩作)들이 ‘담백하면서도 오묘한 맛’을 내는 것도 그런 자존심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말년에 시를 주고받으며 교유했다는 백거이(白居易)가 감상(感傷)으로 시를 썼다면 유우석은 절제(節制)로 시를 썼다.

[주8] 초현(草玄) : 태현경(太玄經)을 초함. 한(漢)의 양웅(揚雄)이 역(易)을 본떠서 태현경을 지었음. 한서(漢書) 양웅전(揚雄傳)에 "양웅이 바야흐로 태현경을 초하면서 스스로 몸 갖기를 깨끗이 하였다" 한 말이 있다. 자운(子雲)은 양웅(揚雄)의 자(字).

[주9] 옥루기(玉樓記) : 죽음을 일컬어, 하늘나라 옥황상제가 거처한다는 누각의 옥루기(玉樓記)를 쓰기 위해서 불려 올려간 것이라 말한다. 

2). 추도정학사서(追悼鄭學士敍) 학사 정서를 추도하며 / 임춘(林椿)

先生瀟灑出塵埃(선생소쇄출진애) 선생은 속기를 벗은 고매한 분

忽嘆風前玉樹催(홀탄풍전옥수최) 아, 바람 앞의 등불처럼 꽃다운 선생의 모습 꺾이다니

上帝已敎長吉去(상제이교장길거) 하늘이 이가 같은 시인을 불러 가심은

海山曾待樂天來(해산증대락천래) 바다와 산이 백락천 같은 시인을 기다렸음이라

當年翰墨爲人寶(당년한묵위인보) 선생의 글 사람들의 보배였으니

高世聲名造物猜(고세성명조물시) 선생의 높은 명성 조물주의 질투라네

從此四明無賀監(종차사명무하감) 이제는 사명산의 가지장 같은 감식가도 없으니

誰能知我謫仙才(수능지아적선재) 누가 우리의 귀양 간 신선의 재주 일아주리..

 

3). 정학사에 차운하여 처음으로 머물며 짓다(次韻鄭學士 之元留題). 

眼界遐觀極大千 아주 멀리 보이는 지극히 먼 곳에

登臨聊與老南泉 애오라지 함께 남천에 익숙하게 올랐네.

門前櫓響淸溪月 맑은 계곡에 비친 달이 문 앞 망루를 향하고

村外樵歌薄暮天 나무꾼의 노래가 외딴 저물녘 하늘가에 퍼진다.

漠漠古灘沙似雪 넓디넓은 오랜 여울, 눈 같은 모래밭에

超超春岸草如煙 봄 언덕 위, 연기 같은 풀은 초연하네.

效嚬欲繼風騷句 맹목적으로 시문 짓는 풍류, 따라 해 보는데

才短多慙溟涬然 짧은 재주에 아무생각 없어 심히 부끄럽도다.

4). 유사암(柳思庵) 사암은 고려 공민왕 때의 문신인 유숙(柳淑)의 호이다. 신돈(辛旽)의 모함으로 죽임을 당하였다. “오랫동안 강호의 언약을 저버리고, 티끌 세상에 이십 년을 살았구나. 흰 갈매기가 나를 비웃으려는 듯, 짐짓 누각 앞으로 가까이 오네.〔久負江湖約 紅塵二十年 白鷗如欲笑 故故近樓前〕”라고 한 <벽란도(碧瀾渡)>시에 차운하다. / 남효온(南孝溫).

未識靑雲路 청운의 벼슬길 알지 못하여 江湖四十年 강호에서 사십 년을 보냈네 思庵終賊手 사암은 적의 손에 죽었지만 余在白鷗前 나는 흰 갈매기 앞에 서 있네.

[주] 유사암(柳思庵) : 사암은 고려 공민왕 때의 문신인 유숙(柳淑)의 호이다. 신돈(辛旽)의 모함으로 죽임을 당하였다. ‘티끌세상 이십 년’은 정서의 바닷가 귀양살이를 빗댄 표현이다.

--이어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