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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유배 류처녀(柳處女)의 삶(生涯)
거제유배 류처녀(柳處女)의 삶(生涯)
  • 거제시민뉴스
  • 승인 2014.07.11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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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례 : 1) 류처녀(柳處女) 개요 2) 거제도 내간리 유섬이의 삶 3). 설화 <류처자(柳妻子) 이야기>와 시조 <처녀의 향수> 4) <부거제(附巨濟)>유섬이의 기록 5) 제거제류처자문[祭巨濟柳處子文] 거제 류처자 제문. 6) 결어 및 제언

1) 류처녀(柳處女) 개요

거제도의 역사문화와 유배고전 자료를 연구하다보면 설화 ‘류처자(柳妻子) 이야기’와 고전 시조 ‘처녀의 향수’를 접하게 된다. 이에 다음과 같이 류처녀(柳處女)의 거제도 유배와 그녀의 삶에 대하여 조명해 보고자 한다.

거제도에서 회자되는 류처녀는 순조1년(1801년 신유년) 신유박해(천주교 탄압) 때 순교자, 사학(邪學) 죄인 유항검(柳恒儉 1756~1801)의 딸로써, 1801년 10월 6일 거제도로 보내졌던 당시 9세인 유섬이(柳暹伊) 연좌죄인이었다.

그녀는 거제부 관비로 배속(巨濟府爲婢)되었고, 71세였던 1863년 계해년(癸亥) 철종14년 7월에, 약 62년간의 기나긴 천애고독(天涯孤獨)한 외로운 신세(身世)로 살다가 사망한 고고한 영혼이었다.

지금까지 류처자 이야기는 거제도 지역민에게 구전되어 오던 이야기였으나 작년 2013년 前수원교회사연구소 고문이었던 하성래(아우구스티노) 선생께서 문중 선조인 거제도호부사를 지낸 하겸락(河兼洛 1825~1904년)의 문집인 <사헌유집(思軒遺集)>을 집필하다가 유섬이(柳暹伊)에 대한 기록을 발견하고 이를 ‘교회와 역사’라는 간행물에 기고하여, 류처녀에 대한 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

<사헌유집(思軒遺集)>권3, 잡저(雜著) 서유록(西遊錄) ‘부거제(附巨濟)’편에는 거제부사 하겸락(河兼洛)이 유섬이의 삶에 대해 간략히 설명한 내용이 담겨 있었고, ‘제거제류처자문[祭巨濟柳處子文]’ 즉, 거제도 류처자의 제문에는 장례를 치른 뒤 삼우제(三虞祭) 또는 1주기 때 보낸 글로써, 류처녀의 생애를 추모하는 감회를 지은 추도문 형식의 제문이었다.

‘류처자 이야기’ 설화는 실제인물을 소재로 하여 100 여년을 거제시민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口傳)되어 전승되다보니 그 내용이 많이 각색되어 있다. 하지만 하겸락 거제부사의 당시 자료와 비교해보면 류처녀의 실제생애와 일치하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1) 첫째로 류처녀는 연좌죄인으로 거제도 관비로 배속되어 평생 귀양살다가 사망하여 거제시 내간리 안골, 송곡마을 뒤편, 내원사 약500m 지점에 묻혀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자연석으로 만든 기단과 ‘칠십일세류처녀지묘(七十一歲柳處女之墓)’ 묘비가 세워져 있다.

(2) 둘째로 내간리 양지 마을 김형택씨의 증언에 의하면, 거제도의 회양적(산적)은 귀양 온 류처자가 처음 만들어 알려진 것이라 전한다.

(3) 셋째로 거제부사 하겸락(河兼洛)이 1863년 계해년(癸亥) 철종14년 7월 체임(遞任) 즉, 벼슬이 갈려 다른 벼슬로 옮겨가려는 시점에 부사의 도움으로 묘지와 묘비가 세워졌다는 점이다. 이후 하겸락은 류처녀 제문까지 지어 거제도로 보낸 기록이 전한다.

(4) 넷째로 류처녀, 유섬이(柳暹伊)는 천주교도 유항검(柳恒儉)의 딸로서 1801년 신유박해(천주교 탄압)때 연좌죄인으로 거제도로 유배와서 내간리 노파에게 수양딸로 입양되어 평생 독신으로 수녀(修女)처럼 살다가 사망했다.

당시 유교적 봉건사회에서 지역민이나 거제부사 또는 거제관리들이 비록 “양반의 딸로 상민과 결혼하여 천민을 낳을 수 없다”는 말로써 처녀의 삶을 영위했다고 전하지만, 이는 핑계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고결하고 순결한 삶을 지키며 동정녀(童貞女)로서 70년의 신앙생활을 고수했음을 짐작케 한다.

(5) 당시 거제부사가 유섬이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제문까지 지어 거제도로 보낸 사실과 내간리의 김씨 집안에서 오랫동안 묘소를 관리해 왔다는 정황은 많은 부분을 시사하고 있다.

이는 먼 변방 거제도에서 이처럼 순결하고 고귀한 분에 대한 지역민의 존경심과 교훈을 영원히 기리기 위함이었다. 실제 유처녀가 철저하게 동정녀로서 살았다는 것은 그녀의 오빠 유중철(요한), 올케 이순이(루갈다) 동정부부의 삶을 본받은 것으로 추정되며 부모와 삼촌 숙모 동생들 그리고 사촌까지 모두 죽거나 관노비로 유배 간 사실에서, 철저한 신앙심이 없고는 이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는 점에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할 것이다.

2) 거제도 내간리 유섬이의 삶

순조1년(1801년 신유년) 10월 중순에 거제부 관아에 도착한 유섬이는(9세)는 당시 거제부사 이영철(李永喆)에게 인계되었고, 아직 너무 어리고 사대부집안의 자식이라는 배려로 곧 내간리에 홀로 사는 노파에게 수양딸로 보내진다.

특히 양어머니는 삭바느질을 하면서 살고 있던 분이라 그녀에게서 바느질을 배워 일로 삼았다. 유섬이는 어릴 때부터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그녀의 풍채와 용모가 단아하고 품위가 있어 아무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였다.

나이 13~14세 되어, 결혼 중매쟁이가 있었으나 동정녀로서 삶을 영위해야할 종교적 신념으로 이를 거절하였다. 보수적 전통사회였던 당시 거제도 주위 분들에게 “내가 자식을 낳으면 모두 노비가 될 것이니 내 어찌 견디겠소?”라며 양해를 구했다.

아는 이 하나 없는 거제도에서 그녀는 수양모를 섬기며 그 뜻에 순종하였다. 어미 역시 자기가 낳은 자식처럼 사랑하며 보호하고 서로 의지하였다. 그녀의 나이 16~17세가 되었을 때, 양어머니에게 “제 나이 점점 자라 강폭(强暴)한 남자의 손이 제 몸에 한 번 가해질까 두렵습니다. 몸을 더럽히면 그 욕됨이 크옵니다.

그러므로 바라건대 흙과 돌로 한 집을 굳게 지어 음식을 넣어 줄 수 있는 구멍과 대소변을 집 안에서 처치할 수 있도록 해주시고, 또한 작은 창을 남향으로 내서 바느질하기에 편하게 하여 주소서”하니, 어머니가 그녀의 말대로 집을 꾸며 주었다.

이는 양어머니가 유섬이의 종교적인 부분을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도와줬음을 시사한다. 유섬이는 이때부터 본격적인 수녀(修女)의 길, 즉 정결 청빈 순명을 서약하고 평생을 독신으로 수도하는 여자의 삶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그녀를 지원해 주던 양어머니가 돌아가신 1830년대 중반 즈음에야 세상 밖으로 나왔으나 이는 고결한 삶을 포기한 것이 아니고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녀가 항상 한 자 길이의 칼을 몸에 지니고 자신의 몸을 보호하고 다니니, 고을 사람들이 그 정절을 일찍이 알고 경외심(敬畏心)에 류처녀라고 불렀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파 두릅 당근 등등의 채소를 꼬치로 끼워 전을 만든 회양적(산적)을 류처녀가 거제도에서 처음 만들었다는 구전(口傳)을 통해서 살펴보면, 그녀 나이 50~60대 이 시기에, 지역 여인네와 어울리며 음식 옷가지 예절 등등을 서로 교류하다가, 1863년 계해년(癸亥) 철종14년 7월71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이때는 거제부사 하겸락(河兼洛)이 체임(遞任) 즉, 벼슬이 갈려 다른 벼슬로 옮겨가려는 시점이었다. 부사는 깨끗한 정절로 지역민에게 존경과 고고한 삶을 살아 온 그녀를 그냥 모른 채 할 수 없어 모든 장례비용을 부담하여 내간리 송곡(명곡)마을 뒤 동편에 그녀를 편히 안장하였다.

1908년 순종1년 7월 9일(양력)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과 법부대신(法部大臣) 고영희(高永喜)가 지난 시절 천주교 박해로 관작(官爵)과 명예를 회복시켜주자는 내각(內閣)의 회의(會議)를 거쳐, 죄명을 탕척(蕩滌)하여 거제유배 유섬이의 아버지 유항검(柳恒儉)이 복권되었다. 이로써 거제 류처녀 유섬이도 가족과 함께 신원이 회복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3). 설화 <류처자(柳妻子) 이야기>와 시조 <처녀의 향수>

설화는 '한 민족 사이에 구전(口傳)되어 오는 이야기의 총칭'이라 정의하며, 말로써 표현한 전승된 구비문학(口碑文學)으로 신화·전설·민담의 세 가지로 나누기도 한다.

설화의 발생은 자연적이고 집단적이며, 그 내용은 민족적이고 평민적이어서 한 지역의 생활감정과 풍습을 암시하고 있다. 거제도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많은 유배자가 다녀간 곳이다. 몸종이나 가솔과 함께 온 경우도 있고,

가정형편이 어려워 부인이나 딸이 동행하여 부양받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유배인들의 설화를 간략히 소개하면, 집안 노비와 딸이 함께 귀양 와서, 세월이 흘러 딸이 성숙하자, 노비가 주인을 협박해 딸을 자기에게 달라고 한다.

언젠가 돌아갈 생각에 반대를 하게 된다. 그 후 노비는 딸을 겁탈하기에 이르고 딸은 목을 맨다는 구전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설화 중에 유독, 한문기록과 거제고전 한글문학작품은 물론, 그 설화가 동시에 전해지는 경우가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① 처녀의 향수 / 연좌 유배, 유섬이(柳暹伊). “서울이라 류(柳)처녀가 거제 음재(음지에) 귀양 와서 대구야 청청 일년이야 봉에 구름아 둥실 높이 떴네 나도 언제 평화로저서 구름같이 떠나갈까”

[주] "대구야 청청 일년이야"는 다른 지역 민요에 자주 등장하는 여흥구이다.

◯ 서울에서 귀양 온 류처녀가 거제 읍내 내간리 명곡(송곡)마을에 살고 있었다. 귀양이 언제나 풀릴까? 먼 북녘 하늘을 바라보다가 산봉우리 구름 타고 고향에 돌아가고픈, 류처녀(柳處女)의 애절한 노래이다.

② 류처자묘[柳處(妻)子墓] / 내간리 내간 양지 마을, 김형택.

[ 안골로 가몬 말이요. 저 안골이라 쿠는데 거 가몬 유처자(柳處子)라 쿠는 묘가 하나 있소. 그 비석만 쓸쓸하게 서 가 있거만. 비석이 돌로 가이고 그 유처자라 쿠고.. 백히(박혀) 가아(가지고) 있소.

게 유처자라 쿠는 묘가 지금 쓸쓸하게 지금 우리가 끼고 있는데, 거기 집의 증조부 때 돼서 내려오는 말인데, 증조부가 그때 뭘 한게 아니라 그 당시 말이지 고을 좌수를 했어요.

좌수를 했는데, 그런께 유처자가 인자 유처자가 있은 기가 그때 합방 안 돼서 조선시대 정승께나 지냈어. 유씨가. 이름은 모리지요. 정승을 지냈던가 뭐 하든가 해서, 못 해서요, 귀양을 왔던 모양이라요. 거제로 귀양을 왔는데, 귀양살이 풀리 가지고 올라가는 판이라.

올라가는 판인데 이 저거 딸을 덷고 내려왔는데 딸을 못 덷고 올라갔어. 딸을 못 덷고 올라 가 가이고 그런께, 요따가 밀아(미루어) 뿌렸어요. 당신 좀 처리해 돌라고, 길러 돌라고. 우리 집안에 길러 돌라고 밀아 뿌렸어요.

그 다음에 죽었다 말이요. 죽은께, 그 전부다 우리가 세밀하게 알아 봤으몬 할 낀데, 이 누 집 자손이라 쿠는 거로 알아 놨으몬 할 긴데 그걸 모리고 그만 그 뿐이라 말이지요.

그래 가지고 그 사람이 죽어 가지고 묻었다 말이지요. 처이로 죽어 가 묻었는데 그래 가묘만 지금 씀쓸하게 서가 안 있소? 비석하고.. / 거기가 뭣이 거제 와서 뭐로 했노 하몬, 거제에 와서 유처자가 들어서 우리가 지금 회양적(산적)이라고 끼고 적을 붙이가 묵거든. 회양적이라고, 이, 파 끼고 뭐 끼고 해가이고 딱 구워 먹는 거 그걸 처음 거제 와서 그 집에서 그 여자가 맨들었다 쿠거든요.

맨들어서 일반 우리가 요새도 해 먹거든요. 제사 지낼 때 그래서 오늘날까지 본을 떠서 제사 지넬 때끼가 적을 부치가 묵거든요.]

부거제/사헌유집

4) <부거제(附巨濟)> / 하겸락(河兼洛 1825~1904년), 출전 <사헌유집(思軒遺集)>권3, 잡저(雜著) 서유록(西遊錄).

철종 임술년 1862년 2월에 외직으로 나가 거제부사에 제수되었다. 거제도는 남쪽 해변의 한 섬고을이었다. 견내량 나루 앞에는 무이루(撫吏樓)가 있었다.

옛날에 우리 종선조(從先祖) 문효공(文孝公) 경재(敬齋) 하연(河演 1376~1453년) 선생이 누각에 올라 지은 제영(題詠)이 걸려 있었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형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판각하여 걸었다.

거제부에는 71세 된 류처녀(柳處女)가 있었다. 정조는 사학(邪學 천주교)을 엄금하고 범법자는 반드시 중벌에 처하고 그 자녀는 관비로 보냈다.

조정의 유명한 벼슬아치 중에도 역시 죄를 범하여 불행을 당하는 자가 많았다. 류(柳)는 어느 집안인지는 모르나 역시 명족(名族), 이름난 가문이라 들었다. 아버지가 사학을 범하여 딸이 관비에 속하게 된 것이다.

그의 나이 7세(실제 9세)였다. 거제읍치에 사는 노파가 수양딸로 삼아 기르며, 바느질도 가르쳤다. 류(柳)는 평생 다른 사람과 더불어 말하거나 웃지 않고 발길이 문밖을 나가지 않았다. 날마다 바느질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관노(官奴) 무리가 감히 관비로 대하지 못하였다.

나이 13~14세 되어 시집보내고자 하는 중매쟁이가 있었으나 류는 “나는 선비의 혈육으로 참혹하고 독한 화를 만나 지금 거제부 관비가 되었다.

남편을 얻게 되면 반드시 관노(官奴)로서 아들을 낳으면 종(奴)이 될 것이요, 딸을 낳으면 계집종(婢)이 될 것이니 이 괴로움을 내 어찌 당하리오. 다시 시집가라고 내 귀를 더럽히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죽음으로써 갚으리라.” 하였다. 수양모를 섬기며 그 뜻에 순종하였다.

어미 역시 자기가 낳은 자식처럼 사랑하며 보호하였다. 나이 16~17세가 됨에 그 어머니에게 “제 나이 점점 자라 강폭(强暴)한 남자의 손이 제 몸에 한 번 가해질까 두렵습니다. 몸을 더럽히면 그 욕됨이 크옵니다.

그러므로 바라건대 흙과 돌로 한 집을 굳게 지어 음식을 넣어 줄 수 있는 구멍과 대소변을 집 안에서 처치할 수 있도록 하고, 또한 작은 창을 남향으로 내서 바느질하기에 편하게 하여 주소서”하여, 어머니가 그 말대로 하였다.

류는 이처럼 자신을 보호하며 나이 40여세가 지난 후에야 비로소 나와서 예사 사람처럼 살았다. 그러나 몸을 보호하기 위해 한 자 길이의 칼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 고을 안 사람들이 모두 그 정절을 알고 감히 더럽힐 마음을 갖지 못하고 류처녀라고 불렀다.

1863년 계해년(癸亥) 철종14년 7월 내가 체임(遞任)하여 돌아가려할 때 형리가 “류처녀가 71세로 죽었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국법에 역적죄로 사망하면 검시하여 순영에 보고토록 되어 있기에 보고한 것이다] 슬프다! 천지만물이 음양의 짝이 있지 않음이 없거늘, 억울하도다! 류처녀는 외로운 여인으로 짝을 만나지 못하고 그 몸을 정결히 하며 이 세상에서 71세를 살았도다.

그 곧고 깨끗한 정절, 원한 맺힌 기운이 구천에 사무친다. 만약 류처녀가 남자가 되었더라면 입신출세하여 임금을 섬기는 충성스러움은 해와 달을 꿰뚫고 진실함은 쇠와 돌을 뚫을 것이다. 애석하도다! 여자의 몸이 되어 참화를 입은 집안에 태어남이여~

그 정(情)과 그 절개 차마 사라지는 것이 아까워 아전을 보내 그 장사할 기구에 무엇이 미비한가 물으니, “관(棺)을 만들 나무와 염(斂)할 포목뿐 아무것도 없습니다.”하여 내가 장사치를 것을 마련하였고 다시 아전으로 하여금 호상(護喪)이 되도록 장사를 치르게 하고, 또 병교(兵校 관아 관리)와 함께 가서 묻을 자리를 살폈는데, 물기가 없고 무너지지 않을 곳을 잡되 암석이 있어 글자를 새길 수 있는 곳에 깊이 묻으라 하고, 특별히 “칠십일세류처녀지묘(七十一歲柳處女之墓)” 아홉자를 묘 옆 바위에 묘표(墓表)로 새겼다.

[ <附巨濟> 哲宗 壬戌二月 外除爲巨濟府使 巨濟卽南邊一島邑也 見乃梁渡頭有撫吏樓 昔我從先祖文孝公敬齋先生 登臨題詠而年久無蹟 乃刊板以懸之 府有七一歲柳處女 正廟祖嚴禁邪學 犯者必置重 其子女屬之奴婢 朝中名官亦多犯遭 柳未知誰家 聞亦名族 父犯邪學女屬官婢 年七歲(誤記 九) 邑婆收養爲女 敎以針線 柳平生不與人言笑 足跡未嘗出戶外 日惟以針線爲事 官奴輩不敢待以官婢 年十三四 有欲嫁之者 柳曰吾以士夫之血肉遭禍慘毒 今爲巨濟官婢矣 作夫則必官奴 而生子爲奴 生女爲婢 吾豈忍爲哉 更有以嫁人汚我耳者 必以死爲報 事義母順志 母亦愛護如己出 柳年至十六七謂母曰吾年漸長强暴可畏男子之手 一加吾身則汚吾辱大矣 願以土石堅策一屋 置飮食出入之竇 置大小便處于屋中 又向陽出一小窓以便針刺 母如其言 柳以此自保 至年四十餘然後 始如平人處 猶以尺劒常隨之 府人皆知其貞 無敢生汚之心 稱以柳處女 癸亥七月余遞任將歸 刑吏告柳處女身死 年爲七十一歲(國法犯逆奴婢身死則以檢驗 狀報于巡營 故來告) 噫噫 天地萬物莫不有陰陽 寃哉柳女孤陰不藕 潔其身 寄斯世七十有一年 其貞白之節 寃恨之氣 徹于九天 若使處女爲男子 身出而事君 忠可貫日月 誠可透金石 惜乎爲女子 身生於慘禍之家也 其情其節 寧忍泯沒卽遺由吏問其送終之具何者 未備曰唯棺木斂布未具 余乃辦給 更使由吏護喪治葬 又使兵校往占地 必取無水氣 無崩頽處 有巖石可以鐫刻處埋之 特鐫七十一歲柳處女之墓 九字於墓 九字於墓側巖面以表 ]

5) 제거제류처자문[祭巨濟柳處子文] 거제 류처자 제문.

영령이시여~ 정결한 옥 같은 자태 촌철 같은 마음 일찍이 국옥을 당하여 이 지방에 노예로 와서 관비의 명부에 올리고 관부의 일꾼이 되었도다.

결혼할 나이가 되어도 행동을 단속하며 깊이 고행했네. 저 봄 수풀을 보면 시절의 경물 기운이 얽히고설켜 만물이 화생(化生)하여 꼬꼬 닭이 울고 떼지은 사슴이 달리다가 각기 짝을 이루어 새끼 낳아 기르고나. 우리에게 형기(形氣)가 있음은 음양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정원의 꽃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슬퍼하지 않은 적 없건만 새와 쥐가 한 보금자리에 살아 사물의 병폐를 만드니 봉황과 올빼미가 무리지어 또 그 질서를 어그러뜨리는 것보다 차라리 스스로 정결하게 하여 선조에게 의로운 뜻 바치는 게 낫지 않으랴.

서슬이 시퍼런 칼을 보이니 누가 감히 어긋난 마음으로 보랴. 문을 에워싼 광적인 자들 혀를 내두르며 숨 죽였다. 어둑어둑한 작은 문에 벌어진 틈새 하나로 햇빛 뚫고 들어와서 내 마음 비추면 바늘 잡고 밝음 곳을 향해 밤낮 쉬지 않더니 귀밑머리 반백이 되어서야 비로소 사람들과 어울렀네.

두 눈썹이 사르르 바람에 떨리고 백발이 온통 머리를 뒤덮더니 옥녀(玉女)의 이가 흔들리고 사선(謝仙)의 마른 몸, 고희의 나이에 초연히 세상을 마쳤다.

뛰어나고 특별한 정절, 청사에 보기 드물기에 예전에 내가 고을에 부임하여 대략 기리고 가엾게 여겨 상여 갖춰 정성스레 묻고 바위 다듬어 묘표 새기니 온 고을 사람들 이목에 잘 보이게 하고 무궁히 밝게 드러나 보였다.

다만 지금 뒤이어 추모하는 감회 더해 제물을 갖추어 보내고 제문 바쳐 위로하거늘, 곧은 혼령 어둡지 않으리니 부디 하늘에서 굽어보소서.

[ 惟靈(유영) 貞玉之姿(정옥지자) 寸鐵之腸(촌철지장) 夙遭鞫詾(숙조국흉) 隷于玆邦(예우자방) 書名鹵簿(서명로부) 白粲爲伍(백찬위오) 年及縱笄(연급종계) 厲操冞苦(여조미고) 相彼春林(상피춘림) 時物烟縕(시물연온) 角角鷄鳴(각각계명) 俟俟鹿奔(사사녹분) 各爲匹耦(각위필우) 嫗育孶生(구육자생) 我有形氣(아유형기) 稟于陰陽(품우음양) 手攀園花(수반원화) 非不永傷(비불영상) 鳥鼠同穴(조서동혈) 爲物之疹(위물지진) 鳳與鴟群(봉여치군) 亦盭其倫(역려기륜) 無寧自潔(무영자결) 獻于先人(헌우선인) 視我霜刃(시아상인) 礪疇敢迕(여주감오) 圜圚狂荒(원궤광황) 吐舌屏氣(토설병기) 闇闇圭竇(암암규두) 呀然一隙(하연일극) 天日透光(천일투광) 照我心曲(조아심곡) 持針嚮明(지침향명) 晝夜不息(주야불식) 鬂髮半華(빈발반화) 始與人齒(시여인치) 雙眉蕭颯(쌍미소삽) 素紒盈咫(소계영지) 玉女齒搖(옥녀치요) 謝仙形槁(사선형고) 及稀之年(급희지년) 翛然觀化(소연관화) 孤貞特節(고정특절) 靑史罕覯(청사한구) 昔我涖府(석아이부) 略加褒愍(약가포민) 庀轊敦瘞(비세돈예) 磨崖表鐫(마애표전) 侈觀一方(치관일방) 昭示無窮(소시무궁) 弟今繼踵(제금계종) 增玆曠想(증자광상) 具送羶薌(구송전향) 槮文以慰(삼문이위) 貞魂不昧(정혼불매) 尙冀鑑右(상기감우) ]

[주1] 촌철(寸鐵) : 작고 날카로운 쇠붙이나 무기. 짧고 작은 무기.

[주2] 노부(鹵簿) :  고려와 조선 시대, 임금이 거둥을 할 때 갖추던 여러 가지 의장(儀仗). 또는 의장을 갖춘 거둥의 행렬. 위 문장에서는 거제부 관비의 명부를 말함.

[주3] 백찬(白粲) : 흰 쌀. 흰 쌀을 만들게 하는 형벌 이름. 여러 가지 잡일을 하게 함.

[주4] 조서동혈(鳥鼠同穴) : 새와 쥐는 암수가 같은 동굴에서 살기 때문이다.

[주5] 규두(圭竇) : 규두는 홀[圭] 모양으로 된 문 옆의 작은 문을 말한 것으로 가난하여 보잘것없는 집을 뜻한다.

[주6] 향명(嚮明) : 세상이 차츰 밝아져 갈 때. 해 뜰 무렵.

[주7] 옥녀(玉女) : 몸과 마음이 옥처럼 깨끗하고 아름다운 여자. 선녀.

[주8] 사선(謝仙) : 사선(謝仙)은 뇌신(雷神)을 말한다. 송(宋) 나라 진종(眞宗) 때 왕진궁(王眞宮)에 화재가 발생하여 기둥 하나만 남기고 전소했는데 그 기둥에 사선이 불을 질렀다는 글자가 있었다고 한다[謝仙火]

 

◯ 치명자산성당 : 1994년 치명자산의 천주교 순교자들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성당.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때 순교한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 1754~1801)부부와 그의 아들 유중철(요한, 1779~1801)부부 등이 순교한 곳. 이들 순교자들의 묘(지방기념물 제 68호)바로 아래에 건립됨. 유항검(柳恒儉)은 거제유배 유섬이(柳暹伊)의 부(父).

6) 결어 및 제언

거제 류처녀 유섬이(柳暹伊)는 천주교 박해 1801년에 거제로 찬축되어, 부모형제와 이별하고 자기 땅에서 쫓겨나, 죽을 때까지 슬픈 이방인으로 살아 온 동정녀였다.

그녀가 거제도에서, 아무도 못 들어오게 흙과 돌로써 탄탄히 둘러싸인 작은 집에서 철저한 신앙생활을 영위한 순결한 삶은 거제부민에게 경외심을 심어 준 참된 신앙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유항검은 2014년 8월에 우리나라로 오는 교황에 의해 시복 결정이 내려져 있다. 이에 거제도 류처녀 유섬이의 묘소도 또 하나의 거제도 천주교 성지가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지금까지 그녀에 대한 많은 기록과 구전(口傳)자료를 살펴보면서, 이제라도 그녀를 기리는 작은 공간이라도 마련해야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특히 그녀가 살았고 무덤이 있는 내간리 송곡마을 주변을 한 동정녀를 기리는 성지로 개발해야함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종교인들의 순례공간으로만 조성하기보다는 송곡마을에서 예로부터 내려오는 이야기나 사라진 문화자산을 함께 일구어, [회양적(산적) 음식시식, 류처녀의 작은 집 복원, 한 자 길이의 호신용 칼 제작, 천주교 고전성경 전시 등등] 거제도의 정체성과 역사문화를 복원하여 거제시민의 자부심을 심어줄 필요가 있다.

과거 마을 주변에 있었으나 사라진 3군데의 성황당 중에 하나를, 류처녀묘 인근에 복원하고, 대숲개(죽림포) 미륵과 마주보는 내간리의 미륵도 새로 단장하여, 류처녀묘와 내원사를 기준으로 역사문화공간을 조성해야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접근성을 고려해, 마을 농로를 확대 포장한다면 접근성을 용이하게 만들 것이다. 또한 거제면 읍치의 여러 문화유적과 연계할 수 있고 명실상부한 거제역사문화의 중심지로써 거듭 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문화유적 조성 사업은 거제시 천주교 담당자와 거제시청 관계자 그리고 시의원, 거제면 지역 이장 및 면장, 지역유지 분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그동안 생각한 바를 제시하고 먼저 실행 가능한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급변하는 사회환경 속에서 잊고 있던 우리의 뿌리와 정체성을 구현해야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후손에게 물려줘야할 의무이기도 하지만 미래 거제도의 역사문화 관광 자원이 된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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